시(詩)가 된 폭포
문자 언어를 통해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키고 이어온 역사를 6.8미터 높이의 폭포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대 갑골문부터 시작해 추사의 세한도에 이르기까지 총 5300권의 책에서 받은 문자 데이터로 제작했다. 문자들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쌓이거나 폭포처럼 쏟아진다. 인간이 오랜 과거에서부터 출발해 팬데믹을 겪고 있는 현재까지,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위해 수많은 변화와 역사를 기록하며 그 정신과 가치를 이어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분열하는 인류
벽 하나를 두고 서로 다른 화살이 마주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현실화되면서 실상(實像)과 허상(虛像)의 경계가 흐릿해진 현시대를 화살의 대치를 통해 표현하는 작품이다. 열매 실(實) 글자가 끊임없이 가루로 흩어지는 영상을 보면서 관객들은 인간이 결실을 맺고자 추구하는 정신적, 물질적 가치와 존속의 의미를 묻게 된다. 거울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은 거울에 꽂힌 화살의 끝이 나를 향하는지, 아니면 내가 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상황을 연출한다.
반전된 빛
밝은 명(明) 자는 해(日)와 달(月)로 이뤄져 있다. 마주할 수 없는 해와 달이 만나 ‘밝음’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세상도 구성원들이 잘 어울려 공존할 때 밝게 빛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반전된 산수
2층에 있는 작품 <분열하는 인류>가 거울을 통해 모호해진 실상과 허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3층의 <반전된 산수>는 물을 소재로 실상과 허상의 경계를 연결하며 대상의 본질에 집중할 것을 주문한다. 상하가 뒤집힌 산수화 영상은 물 속에서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나타낸다.
동서양의 고전회화에 기운생동(氣韻生動)을 불어넣어 역동성을 구현하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이이남(1969년生) 작가가 과학 기술을 동원한 자아 탐구에 나섰다. 무분별한 데이터 속에서 자신과 연결된 DNA 데이터들을 수집하여 역추적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결과물을 사비나미술관에 펼쳐 놓았다.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 최첨단 기술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실험을 거듭해 온 이이남은 이번 전시에서 서울대학교 생명과학 지플러스 생명과학 연구소와의 협력해 자신의 DNA 데이터를 추출하고 이를 디지털화한 영상, 설치, 평면 작품 등 총 21점을 선보인다. 고전회화를 디지털 복제해 자신의 DNA 데이터와 결합한 다음 이이남만의 새로운 디지털 산수화를 재창작했다.
우리는 ‘나’라는 신체를 가진 순간부터 온전히 자신을 마주 볼 수 없으며 주변의 이미지와 주변 정보들을 통해 얻어지는 간접적 정보로 나를 성찰하는 한계를 가진다. 이 한계를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성찰하고 존재의 중심을 찾고 싶었다. ‘나’라는 형상에서 DNA 데이터를 추출해 디지털로 변환했다. 고전회화 안에 이 DNA 데이터를 결합해 새로운 미디어 아트를 만드는 건 나의 뿌리와 본질을 찾으려는 탐구의 여정이다. 온전한 나를 보려는 욕망의 투영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나의 뿌리와 본질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가며, 앞으로 우리의 공동체와 인류는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 상상하려 한다.
– 이이남 작가 –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곳곳에 거울을 설치했다. 관객과 대상이 구분되는 서구의 풍경화와 달리 동양의 산수화는 관객이 작품 속에서 대상과 하나가 된다. 물아일체의 경지다. 동양회화의 핵심 개념인 ‘시화일률(詩畵一律, 시와 그림은 다르지 않다)’에 주목한 결과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시화일률처럼 실상과 허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람객을 작품 속에 끌어들여 작품과 관객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사비나미술관(관장 이명옥)이 2021년 여름특별전으로 마련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The breath of life> 전시에서 이이남의 ‘자아 탐구’ 여정에 동행할 수 있다.
■ 이이남 –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
The breath of life2021년 6월 16일(수) ~ 8월 31일(화)
사비나미술관 기획전시실(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1로 93)
총 21점(모니터 영상 15점 / 영상설치 6점)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 창작산실
문의 : 02)736-4371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ㅣ사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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