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단색화의 선두 주자인 박서보 화백과 예술의 일상화를 내걸고 대중 친화적인 시도를 거듭하고 있는 프린트베이커리의 ‘콜라보’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여의도의 대형 복합 쇼핑몰 ‘더현대서울’ 2층에 자리한 ‘프린트베이커리 더현대서울점’에서 지난 22일 ‘박서보 신작 에디션 런칭 기념 전시’가 개막했는데요.
연필 묘법으로 시작해 후기의 색채 묘법에 이르기까지 세계 미술계가 인정할 정도로 당당히 자신만의 독자적 작품세계를 구축한 구순의 화가가 모습을 드러내자 전시장의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박 화백은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지했지만 자신감과 자부심만큼은 여전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다다르자 휠체어에서 내리더니 지팡이를 짚고선 가족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전시장을 한 바퀴 돌며 자신의 원화를 한정판으로 찍어 제작한 판화 에디션 작품을 꼼꼼히 둘러봤습니다.
이어 프린트베이커리가 마련한 ‘작가와의 만남’ 행사도 가졌는데요. 박서보는 몰려든 관람객들 앞에서 구순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정적인 ‘즉석 강연’을 펼쳤습니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다 예상한다는 듯 마이크도 없이 무려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열변을 토했는데요. 그의 인생과 삶의 가치관, 작품에 임하는 태도 등을 작가로부터 직접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발언을 문답 형식으로 옮깁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간중간 임의로 질문을 삽입해 일문일답 형식으로 구성했습니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둘러본 소감은.
판화가 잘 나왔다. 원화의 느낌을 잘 살렸다.
박서보에게 그림이란…
수행의 도구다. 나 자신을 비워내는 과정이다. 힘든 시기일수록 다 놓아버려야 한다. 막다른 절벽에 봉착했다고 외부에 의존하려 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내면의 세계 속으로 더 걸어가야 한다. 주변 탓만 하고 술 먹고 신세 한탄해봤자 소용 없다. 자기 자신에게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통찰력과 열정만 간직하고 있다면 언제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연필 묘법에서 시작해 지금의 색채 묘법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며 이어오고 있는 작업 방법인 묘법도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탄생했다. 궁핍에서 창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국내파 출신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거장이 됐다.
해외 전시나 아트페어 나가면 모두 나더러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니 ‘한국 단색화의 아버지’라고들 부른다. 유학 한 번 안 가고 한국에서 나만의 독자적 미술세계를 구축한 점을 높이 평가해주는 것이다. 김환기랑, 이중섭도 ‘아버지’ 소리는 못 듣는다. 다들 외국에서 배운 걸 한국에 전파하고 그걸 가지고 영향력을 키워갈 때 나는 다른 길을 걸었다. 한국만의 그림을 만들어서 세계로 진출하고자 노력했다.
쉬운 길은 아니었을텐데…
보수적인 화단을 중심으로 반발이 많았다.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반대하는 현대미술가협회를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앵포르멜 운동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는 등 끊임없이 기성 제도와 기존의 질서에 저항했다. 그림에서도 서구의 사조를 흉내만 낼 게 아니라 한국만의 독자적 화풍을 창조하고 싶었다. 중용, 주역, 한학, 철학 등 닥치는 대로 읽고 파고들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이 ‘비움’이었다. ‘르네상스'(인문주의)로 상징되는 서양의 예술이 인간을 중심에 두고 눈에 보이는 자연을 그리면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관심을 두고 발전해 왔다면 동양, 그 중에서도 한국의 예술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경지를 추구한다. 자연 앞에서 겸허히 마음을 비워내는 인간의 행위에서 내 예술세계의 해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묘법의 시작이 궁금하다.
방향은 정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을 모르겠더라. 어떤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야 ‘비움’이라는 철학을 표현할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커 가고 돈은 필요하고 작업에는 별 진척이 없고 이래저래 절박한 상황이었는데 어느 날 세 살짜리 둘째 아이가 형의 공책에다 글 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정해진 네모 칸 안에 반듯하게 글자를 적어넣는 연습을 하도록 고안된 공책이었는데 신경 써서 적는다고 해도 잘 안 되니까 둘째가 포기하고는 연필을 제멋대로 막 휘갈겨 버리더라. 그걸 보면서 깨달았다. ‘저게 비움이구나’ 아이가 했던 행위를 캔버스 위에서 그대로 따라해 봤다. 그게 1967년이었다. ‘연필 묘법’이 탄생한 순간이다.
박서보 작품과 서양 예술의 궁극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다르다. 예를 들어, 서구의 예술가들은 선을 그리려고 하지만 내 작품 속의 선은 다르다. 수행 방법의 결과물이 그저 선으로 나타난 것뿐이다. 2주간 물에 불린 세 겹의 한지 위에 굵은 연필과 쇠꼬챙이 등으로 계속 긁어낸다. 하루종일 고랑을 파는 작업을 계속하다 밤이 되면 지쳐서 잠자리에 곯아 떨어지는 생활을 반복했다. 같은 작업을 몇 날 며칠 거듭하다 보면 문득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그렇게 수행하듯이 자신을 비워내고 남은 것이 선이다.
올해 구순을 맞은 박서보(1931년生)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단색화의 거장입니다. 일본 유학파 등 이전 세대와 달리 대학(홍익대 미대) 졸업 후 평생 국내에서 그림에 정진한 ‘토종 화가’로서 한국 단색화를 세계적 수준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지난 6월 20일자 뉴욕 타임즈가 풀 스토리 기사로 박서보의 인생과 예술 철학, 작품세계를 싣기도 했지요. 그의 작품은 국내·외 유수의 경매에서 김환기, 이우환, 정상화 등과 엎치락뒤치락하며 국내 작가 최고가 낙찰 기록을 다툴 정도로 한국 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국내 최고 ‘블루칩’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국내 최대 경매업체인 서울옥션의 자회사로 2012년 문을 연 ‘프린트베이커리’가 서보미술문화재단과 손을 잡았습니다. 박서보 신작 에디션 독점 판매에 나섭니다. 신작은 모두 6점으로 한 점당 99개의 리미티드 판화 에디션을 선보입니다. 묘법의 시작이었던 1970년대 작품부터 런던 화이트큐브 전시에 올리며 단색화를 세계에 알렸던 한지 바탕의 80년대 작품, 지그재그 묘법에서 벗어나 직선 묘법의 탄생을 알렸던 90년대 작품과 자연의 색을 담아 박서보 미술 세계의 정점을 보여주는 후기 묘법(색채 묘법)에 이르기까지 시기별 대표작들로 구성했습니다.
박서보 화백의 장남인 박승조 이사장이 2015년부터 운영을 맡고 있는 서보미술문화재단은 프레스코 지클리 판화지에 자체적으로 보유한 고급 판화 기술을 활용해 원작의 이미지를 심도 있게 구현했습니다. 프레스코 지클리는 종이가 아닌 회반죽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프레스코 기법을 적용한 판화지로, 원작의 질감과 색상을 보다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습도, 자외선에도 강해 장기 보존이 가능합니다.
국내 최초로 이번 신작 에디션의 미술품 보증서에 블록체인 기반의 NFT(대체불가능토큰) 기술을 적용한 것도 눈에 띕니다. 복제나 위조, 변조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 자칫 미술품 보증서를 분실하거나 오염, 훼손, 폐기 등의 돌발 사고를 당해도 작품 보증이 가능하도록 안전성을 강화한 게 특징입니다.
에디션 구매자에겐 박서보 원작 이미지 30여 점의 디지털 감상권도 함께 제공합니다. 무선 인터넷을 연결한 디바이스라면 어디서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 박서보 신작 에디션 런칭 기념 전시
2021년 9월 22일(화) ~ 10월 17일(일)
프린트베이커리 더현대서울점(더현대서울 2층)
10:30 – 20:00
(주말 10:30 – 20:30)
문의 : 070-4912-6546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ㅣ프린트베이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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