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생각하는 그 ‘루이 비통’ 맞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명품 브랜드들이 미술 전시를 개최합니다. 대다수는 무료로 진행돼 수익을 얻을 수 없고, 자사의 제품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다 보니 직접적인 홍보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려운데 말이죠. 게다가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을 설치하는데 들어가는 인력 및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속물 같지만 이런 결론에 이릅니다. 아니, 왜?
루이 비통의 사례를 통해 그 이유를 유추해 봅니다. 루이 비통은 현대미술과 예술가, 그리고 동시대 미술 작가에게 영감을 준 20세기 작품을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미술관을 설립했습니다. 재단 미술관은 소장품 전시와 기획전을 통해 더 많은 대중이 예술과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해오고 있죠.
이들은 자체 소장품 전시 외에도 전 세계 유수 국공립 및 사립 기관, 미술관과 박물관, 문화예술 재단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국제 프로젝트 또한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 한들 대체 왜? 업계 관계자들은 “잠재적 고객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그 이유로 꼽습니다. 또 “브랜드 고유의 감성을 전달하는데 예술가/작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지난 10월 1일,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 <앤디 워홀(Andy Warhol): 앤디를 찾아서(Looking for Andy)> 전시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 전시는 루이 비통의 컬렉션 소장품 전시를 선보이는 ‘미술관 벽 너머(Hors-les-murs)’ 일환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입니다. 앞서 이곳에서는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전시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속사정이 무엇이든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좋은 전시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즐기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은 앤디 워홀 하면, 어떤 이미지가 ‘자동 완성’ 되나요? 캠벨 수프 깡통, 메릴린 먼로, 20세기 팝아트의 대가, 동시대의 피그말리온,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시대의 아이콘…. 그의 이름만큼이나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들이 낯설지 않습니다.
뒷조사를 조금 더 해보았습니다.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드로잉을 전공한 앤디 워홀은 광고 일러스트레이터로 경력을 쌓았습니다. 이후 워홀은 화가, 영화 제작자 및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소비 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미디어 시대의 우상 숭배 현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갖게 됐죠. 영민했던 그의 생각은 언제나 시대를 앞서갔습니다. 1968년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전시에서 워홀은 “미래에는 모든 사람이 15분간 세계적인 명성을 누릴 것”이라고 예언했는데요. 그 명성은 워홀에게도 해당됐습니다.
자신이 몸담았던 광고계와 대량 생산에서 비롯된 연속성 개념에 주목한 작품으로 주목받은 워홀은 전통적으로 산업 분야에 활용되어 온 실크스크린 인쇄 기법을 채택해 1960년대부터 리즈 테일러, 재키 케네디를 비롯한 유명 인사를 주제로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하는 작업을 펼쳤습니다.
1964년에는 ‘팩토리(Factory)’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설립해 예술계에서 혁신적인 행보를 이어나갔죠. 팩토리는 당대 예술가는 물론 시인, 배우, 뮤즈, 뮤지션, 컬렉터의 이목을 끌며 뉴욕 언더그라운드와 유명인들 사이에서 사교의 중심지로 거듭났습니다. 이후 1980년대까지 워홀은 사진, 회화, 조각과 미디어 등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기법을 시도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초기작부터 1987년 갑작스럽게 사망하기 1년 전에 그린 최신작까지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소장품을 10점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특이점이 있다면, 작품보다 그의 생애에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앤디 워홀의 ‘자화상’을 주제로 말입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은 1967년의 자화상(Andy Warhol Self-Portrait)입니다. 이 자화상은 1960년대 작업한 세 점의 자화상 시리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빨간 컬러 속에 숨겨진 워홀의 모습을 보며 개인적으로는 ‘신비롭다’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손을 입 가까이에 갖다 대고 턱을 괴고 있는 지극히 단순한 동작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한 상상을 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동작은 평소 워홀이 자주 취했던 제스처라고 합니다.
워홀은 이 작품을 통해 작가와 관객의 모습이 공존하는 예술가의 전형적인 형상을 구현했습니다. 대중들이 예술인을 상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를 작품 속에 담아낸 것이죠. 예상대로(!) 작품은 큰 인기를 끌었고, 1970년대 물밀듯 쏟아진 초상화 제작 주문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워홀은 이후 10여 년간 자화상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1968년 급진적 페미니스트 작가인 발레리 솔라니스가 쏜 총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은 구했지만 생사의 경계를 오간 그는 이때부터 죽음에 대한 고뇌에 빠졌습니다. 워홀은 이 시기 “나는 내가 정말 살아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모르겠다. 인생은 마치 꿈과 같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죠. 멀어진 자화상과의 거리는, 어쩌면 그가 느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자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가 1978년, 다시 자화상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동일한 크기의 사각 판형 자화상 4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에는 각도를 달리한 얼굴 사진 3장이 겹쳐져 있습니다. 얼굴의 4분의 3 지점까지 보이는 첫 번째 사진에서 워홀의 시선은 카메라 렌즈를 향하고 있지만, 맨 뒤의 사진으로 갈수록 옆모습에 가까워지는, 흡사 GIF 파일 같습니다. 워홀은 스냅샷으로 촬영한 하나의 사진을 기반으로, 중심점에서 약간 빗겨난 위치에 사진을 차례로 덮어씌워 미묘하게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줬습니다. 중첩된 이미지를 통해 워홀의 복합적인 내면과 자아를 보여준 것이죠.
이번 전시에서는 워홀의 다양한 폴라로이드 자화상도 만날 수 있습니다. 워홀은 “사진을 찍는 행위는 마치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며 스스로의 모습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유품으로 나온 폴라로이드 사진만 5만 장이 넘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워홀의 폴라로이드 사진은 말 그대로 다채롭습니다. 그는 짙은 색의 커다란 안경 뒤 모습을 가린 채 등장하는가 하면 자신이 직접 고른 배경색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가며 출현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 12여 개의 액자로 모아보기 된 폴라로이드에서는 남성 셔츠, 넥타이와 대비되는 진한 화장과 가발, 남성과 여성을 오가는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엿볼 수 있는데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다룬 것이라고 합니다. 그와 협업한 사진작가 크리스토퍼 마코스는 “워홀은 이 작업을 통해 아름다운 여성처럼 보이길 바란 게 아니라 아름답게 보이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습니다.
드래그퀸인 배우의 초상화인 ‘레이디스 앤 젠틀맨’(Ladies and Gentleman, 1975년작)도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아트 딜러 루치아노 안젤리노의 의뢰로 제작된 이 초상화 시리즈는 맨해튼 클럽가에서 모집한 14명의 모델을 찍은 사진 500여 점 중 268점을 실크스크린으로 작품화한 것입니다.
관람의 마지막 순서로는, 1986년 그가 사망하기 1년 전 제작한 대표작을 감상하기를 추천합니다. 검정 배경에 보라색으로 자신을 표현한 이 작품에서 워홀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가발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과 무표정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또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정작 그 눈빛이 어떤 대상을 특정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초점 없는 워홀의 눈동자가 삶과 죽음 경계 위에 올라선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앤디 워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저와 제 페인팅, 영화에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 됩니다. 그 이면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수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통해 창조된 현대판 나르시스 신화, 앤디 워홀은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역으로 질문을 던져봅니다. 여러분의 사전에서 워홀은 어떤 존재로 각인되었나요? 전시는 2022년 2월 6일까지 이어집니다. 사전 예약 권장.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컬렉션 Courtesy of Fondation Louis Vui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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