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대중화’ ‘일상의 예술화’를 향한 미술계의 이런저런 시도가 잇따르는 요즘이다. 넘치는 아이디어를 주체할 수 없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는 아트 비즈니스 스타트업 ‘핀즐'(Pinzle)의 진준화 대표를 지난 2일 만났다.
핀즐은 현재 40여 명의 소속 작가들과 함께 2017년 시작한 ‘그림 정기 구독 서비스’를 비롯해 한정판 디지털 판화 판매, 다양한 기업들과의 아트 콜라보 사업 등을 펼치고 있는 온라인 기반의 아트 비즈니스 기업이다.
2016년 창업했으니 어느덧 5년이 흘렀다. 스타트업이라는 호명(號名)이 어색할 수도 있지만 ‘산전수전’을 거쳐 지난해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외양을 갖추고 내실을 다져가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비행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때마침 미술시장에 순풍이 불고 있다. 비행 속도가 거침없다. 올해 들어 순풍에 돛단 듯 거침없이 몸집을 불려가고 있다. “핀즐의 시대를 열겠다”는 진 대표의 포부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사업을 할 운명이겠거니 생각했다고 한다.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동기들이 대기업에 취직할 때도 갓 출범한 벤처 기업을 택했다. 스포츠 마케팅 회사였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스포츠 스타와 브랜딩, 마케팅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고 히트 스포츠 용품을 잇따라 선보이며 나름 경력을 쌓았다. 5년쯤 시간이 흘렀을 때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감히 그만두고 나왔다. 결혼한 지 한 달 만이었다. 4개월을 ‘백수’로 살았다. 신혼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어 인테리어로 그림을 선택했는데 막상 ‘어떤 그림을 골라야 할지’부터 막막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은 너무 비쌌다. ‘그들만의 리그’였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미술 작품을 향유할 수는 없는 걸까?
‘아트 비즈니스’를 통해 이런 질문의 답을 찾고 싶었다. 자신처럼 미술 시장에 막 뛰어들려는 사람들의 궁금증과 애로 사항을 해결해주는 것부터 시작해 그들의 생애 주기와 함께 성장해 나가다보면 장차 미술시장을 선도하는 회사를 이끌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선배, 지인 등 3명과 함께 스타트업을 차렸다. 핀즐의 탄생이었다. 핀즐은 독일어로 ‘화풍’을 뜻하는 말이다. ‘미알못(미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들도 편하게 그림을 감상하고 나름의 취향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뜻을 담은 작명(作名)이다.
사업 아이템은 간단했다. 작가와 원화를 독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 ‘아트 프린트’ 작품을 찍어낸 다음, 매달 일정한 금액을 내는 이용자들에게 보내주는 ‘그림 정기 구독 서비스’였다. 핀즐의 큐레이터가 계절, 트렌드, 사회적 이슈 등을 고려해 매달 보낼 배송 작품을 선정했다. 1년이면 이용자들은 아티스트 12명의 작품과 ‘깜짝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60여쪽의 인쇄 매체도 함께 보냈다. ‘이번 달에 내가 받아본 작품은 어떤 스토리를 갖고 있는지’, ‘작가의 작품세계는 어떠한지’ 등을 상세히 취재해 실었다. 해외에서 찍은 작가의 작업 영상과 작가 인터뷰 등도 유튜브로 제작했다. 코로나 여파로 잡지와 영상 제작은 당분간 보류한 상태다. 월 구독료도 낮춰 지금은 2만원 정도를 내면 매달 새로운 작가의 ‘아트 프린트’ 작품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
초창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작품 한 점을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을 핀즐에 넘기면 월간 미술 매거진과 핀즐 플랫폼을 통해 회원들과 정기 구독 서비스 이용자들에게 작품을 널리 알려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작가들을 설득했다. 돈 나올 구석이 없어 작가들에게 매출의 몇 %를 지급할 것을 약속하는 계약을 맺을 형편이 아니었다. 작가 섭외 과정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국내 작가들 섭외는 특히 어려웠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작가들이 대중 앞에 나서는 게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 아티스트들 중에는 인플루언서 수준의 홍보 감각과 연예인까지는 아니어도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려 대중과 활발히 소통하려는 의지를 가진 이들이 많았다.
해외에선 실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국내엔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들을 찾아 직접 해외로 날아갔다. 핀즐과 계약을 맺고 활동 중인 40여 명의 전속작가들 대부분이 해외 아티스트들인 건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계약금 한 푼 받지 않고도 핀즐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믿어준 덕분에 많은 해외 아티스트들을 소속 작가로 확보할 수 있었지만 다음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비자들은 생각만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돈 좀 있고 시간적으로도 여유 있는 계층이 관심을 갖고 사는 게 그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원화도 아닌 프린트 아트에 왜 돈을 지불하고 구독 서비스를 신청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업이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공동창업자들이 하나둘씩 핀즐을 떠나기 시작했다. 창립멤버 중에서 남은 이는 진 대표가 유일했다.
정부 지원금과 대출을 받은 돈으로 근근이 버티면서도 사업 아이템을 가다듬고 직원을 새로 뽑는 등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끈질긴 노력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의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고 그게 2019년 말이었다. ‘열정페이’로 일하던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있게 됐고 지난해 중반에는 순익분기점을 넘겼다. 매출의 일정 비율을 작가 몫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라이선스 계약 체결에 따른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게 되자 작가 섭외에 탄력이 붙었고 서비스 이용자도 늘어났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년 대비 매출이 2배 성장했다. 매달 그림을 받아보는 정기 구독자의 숫자도 지난해 500명 수준에서 지금은 1500명을 넘어섰다.
사업 아이템도 다변화하고 있다. ‘12 한정판 에디션’이 대표적이다. 그림 구독을 통해 경험치가 쌓이면서 자신의 취향을 파악한 이용자들 사이에서 그림 구입을 희망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2에디션은 이런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한 서비스다. 전속작가의 작품을 디지털 판화로 찍어 한정판 12점을 소비자들에게 판매한다. 최근에는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에 ‘팝업 스토어’를 열어 판화 에디션을 소장하려는 MZ세대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기업과의 ‘콜라보’도 활발하다. 상품 제작부터 판촉에 이르기까지 예술을 활용하려는 기업들의 협업 제의가 밀려든다고 했다. 40여 명의 전속작가와 독점 라이선스를 보유한 1000여 점의 작품을 앞세워 핀즐이 먼저 기업을 접촉하기도 한다. 같은 제품이라도 디자인이 예쁘거나 깜찍한 캐릭터를 입히면 소비자들의 반응이 한결 나아지는 걸 목격한 기업들이 아트 마케팅 차원에서 제작 단계부터 상품에 예술을 입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종의 아트 브랜딩 전략이다. 아트굿즈 열풍이나 백화점 등 유통업체들이 매장 내에 잇따라 갤러리를 여는 것도 그 일환이다. 핀즐은 최근 기아자동차, LG생활건강, 패션브랜드 한섬 등 기업들과 제휴를 맺고 소속 작가들의 작품 이미지를 활용한 홍보 콘텐츠를 제작하는가하면 패키지 아트 상품을 한정판으로 선보였다.
협업 방식은 기업들이 핀즐 소속 작가의 기성 작품을 제품 디자인이나 광고 콘텐츠로 구현하는 수준에 그칠 때도 있고 상품 기획 단계에서부터 핀즐 작가들을 참여시켜 전혀 새로운 콘셉트의 아트 콜라보 상품을 만들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제품 판매에 따른 기업과 작가, 핀즐 간의 수익 공유 비율은 달라진다.
핀즐은 올 하반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그림 구독 서비스 ‘키즈(Kids) 라인’을 추가로 선보일 예정이다. 성장기 자녀의 감성에 발맞춘 작품을 구성해 이들이 어릴 때부터 미술을 곁에 두고 다양한 화풍을 즐길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현재 20~30대가 주축인 핀즐의 서비스 이용 대상을 더 확대할 계획이다. 배송비만 결제하면 최근 개발에 성공한 ‘AR(증강현실)-KIT’를 각 가정으로 보내는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 ‘AR키트’를 벽에 붙인 상태에서 핀즐 사이트를 열어 모바일 화면을 스캔하면 구입하려는 작품의 크기, 색상 등이 공간과 잘 어울리는지 등을 미리 체험해볼 수 있는 서비스로, 특허 출원까지 이미 마쳤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핀즐은 이미 독점 라이선스를 확보한 1000여 점의 작품을 NFT(대체불가능토큰)로 발행해 판매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올해 말까지 가장 많은 NFT 작품을 보유한 갤러리가 되는 걸 목표로 40여 명의 소속 아티스트들과 관련 협의 및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빠르게 성장할 걸로 예상되는 블록체인 기반의 NFT 아트 시장에 진출해 국내에서는 드문 ‘해외 아티스트들의 NFT 작품 전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포부다.
“하고 있는 게 너무 많죠? 더 늘려갈 겁니다. 핀즐의 화려한 도약, 지켜봐 주시고 또 응원해 주세요”
진 대표가 환하게 웃었다.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com
콘텐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