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해와 달은 뿌리가 없다. 그러나 항상 규칙적인 듯 한 길을 맴돈다.
인간도 이를 닮았던가. 어머니와의 탯줄을 자르면서 뿌리 없이 외톨로 동서남북을 떠돈다.
그러면서 처자권속(妻子眷屬)을 부양(扶養)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치르다 보면
검은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저 언덕 위의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인생의 상궤(常軌)다. 이러한 인생의 상궤를 뒤집어 놓고 보면 ‘삶’이란 누구를 위해 슬퍼하고 기뻐할 것이며 또 누구에
게 꺼벅 기울어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길목이 되기도 한다.
화가의 붓끝은 이 뿌리 없는 우리의 서글픔을 놓쳐서도 안된다.― 서세옥-
서세옥 화백이 남긴 글인데요. 한학자이자 항일 지사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서예와 시에 능해 젊은 시절에는 문학에 뜻을 두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곧 미술로 진로를 바꾸어 194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로 문을 연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1회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렇게 미술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서세옥 화백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치열한 한국 현대사를 겪으면서 ‘일제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작품으로 화답했습니다.
해방 후 미술계의 주된 논의 주제는 일제 청산과 한국 동양화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채색화 분야는 배제하고 문인화 등의 영향을 받은 수묵화 계열이 유행했습니다. 항일 지사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민족성이 몸에 배었던 서세옥 화백도 이와 같은 흐름에 공감해 ‘문인화(文人畫, 사대부 지식인들이 즐겼던 서예와 시에서 유래)’의 요소를 재해석하며 동양화에서 추상의 가능성을 찾아냈습니다. 1960년에는 수묵을 중심으로 전통의 현대화를 꾀하는 ‘묵림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국내 화단에 수묵 추상의 길을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인간이라는 주제에 몰두하며 정제된 점과 획, 번짐, 여백으로 구성된 ‘사람들’ 연작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가장 귀중한 존재라고 생각해 인간을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았습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인간의 모습은 원형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고 관람객들로 하여금 각자 다른 것을 떠올리게 하는 추상적인 형태입니다.
“점이 이어진 선들이 거대한 원을 이루고, 이 원은 출발점도 종착점도 없이 순환된다.”라는 서세호 화백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인간과 삶에 관해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듭니다. 나이, 인종, 성별의 구분 없이 오직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도록 이끌어 관람객들을 더 깊은 사색에 빠져들게끔 합니다.
그림을 실제로 보는 것과 사진으로 보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계실 텐데요. 붓의 흐름, 먹의 농담, 번짐까지 사진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아 수묵화는 그 차이가 특히 큽니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전시장을 직접 찾아 서세옥 화백이 남긴 ‘인강 군상’을 실제로 감상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서세옥 개인전 <사람/들>
8월 5일(목) ~ 9월 18일(토)
11:00 -19:00
*월요일 휴무
리만머핀 서울(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8 1층)
문의 : 02)725-0094
올댓아트 구민경 인턴
권재현 전시팀장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ㅣ리만머핀, 올댓아트 김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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