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타이틀 매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링 위에서 펼쳐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 각자의 공약을 내걸고 팽팽하게 맞서는 선거장의 후보들? 생각을 확장해 만약 이를 예술에 적용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타이틀 매치’가 그 해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2014년 시작된 ‘타이틀 매치’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두 명의 작가가 함께 선보이는 2인 전시입니다. 2017년까지는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원로 작가와 차세대 작가가 합을 맞춰 시대를 넘어선 소통의 장을 펼쳐 보였고, 이후에는 작가와 평론가 등 연령과 장르를 넘나들며 변화를 꾀했습니다. 제목과는 달리 경쟁을 함의하는 ‘빅 매치’가 아닌 화합에 초점을 맞춘 실험의 시간이었죠. 특히 올해는 ‘미술’과 ‘음악’, 두 장르의 ‘선수’들이 출전했는데요. 그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미술 코너를 대표하는 선수는 임민욱 작가입니다. 그는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하는 영상 설치와 일상 오브제를 조각으로 만들어 내는 미디어 아티스트인데요. 공동체와 기억의 문제, 장소와 존재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근대성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음악 코너의 선수는 장영규 감독입니다. ‘이날치’ 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그는 1990년대 중반 어어부 프로젝트로부터 시작해, 비빙과 씽씽에 이어 이날치를 이끌며 밴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장르와 소재를 터뜨리며 역동적인 에너지를 쏟아내는 아티스트죠.
사라지는 것들, 눈에 보이거나 들리지 않지만 이어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며 다른 시간대의 공존에 주목해 온 두 사람은, 이번 전시에서 사라지는 매체와 목소리, 역사와 환경으로부터 파생된 시간의 조각들을 비선형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의심과 추측을 통해 잔존하는 것들에서 나타나는 징후를 포착하고 이를 단서로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하고자 했죠.
이를 위해 두 사람은 ‘교대’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웠는데요. ‘바꾸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교대’는 기능적인 관점으로 시간을 다루는 ‘교체’와 다르게 순환과 공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무엇이 변하고 움직이는지 혹은 변하지 않는지를 추적하며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점을 다중화 했습니다.
먼저 임민욱 작가는 하찮은 것과 고귀한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등 상반된 가치로 여겨지는 부분들을 절합하여 고착화를 지연시키고, 그 빈틈을 응시할 수 있는 작동 모델로 교대를 상정했습니다. 전시실1에 자리한 위 작품은 ‘두두물물’입니다. 이는 삼라만상, 세상 모든 것을 가리키는 한자성어인데요.
임 작가는 일관된 의미나 논리가 없이 파편화되고 분산돼 있는 장소, 주변화된 것, 변이하는 사물의 과정을 응시했습니다. 이 작품의 설치 구조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옆에 위치한 별 광장에서 착안했다고 합니다. 구글 어스를 통해 미술관과 이를 응용한 이미지의 형태 위에 포석정지의 석축 구조를 빌려와 만든 도자 조각, 스티로폼, 나무, 캐스팅 조각들을 뒤섞어 두었습니다.
잠깐, 왜 포석정이냐고요? 포석정은 국왕들이 유흥을 즐기던 놀이 공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름의 유래와 건축 연도가 불분명하고 물길도 재현된 적이 없으며 신라가 몰락한 비운의 장소로 추정하고 있지만 이 또한 단정 지을 수 없는 곳이죠. 작가도 바로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형틀에 잠겨 있는 사물들은 작가가 간직해오던 물건이나 작가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재료들입니다. 서로 뒤엉켜 있는 사물들은 그것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나무틀의 껍질로부터 벗어나면 서로 우연히 연결되거나 단절되는 관계 속에서 새롭게 자리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또 다른 작품은 ‘불의 마음’입니다. 작가는 어떻게 하면 불확정적이고 억압적인 관계로부터 해방되고, 유동하는 공포나 주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고민 끝에 공기, 흙, 물, 불의 힘이 저자의 의도나 주체성과 별개로 작동한다는 결론을 내었다고 합니다.
필요조건과 기준을 충족시켜도 ‘불의 마음’에 따라 매번 예측할 수 없는 도자 결과물은 이런 결론을 반영한 것이고요. 그는 전복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포석정의 석축 구조를 빌려와 틀을 만들고 기억의 사물과 물질로 채운 뒤 다시 해체해서 단면들을 보여줍니다. 우레탄폼, 에폭시 레진과 같은 현대적인 재료와 이질적인 결합을 보여주기도 하죠.
전통이 무엇인지 탐구하는데 매몰되지 않으려고 한다. 전통이 뭔가 조금씩 남겨진 조각이라고 생각한다. 그 조각 자체에 관심을 두고 ‘이걸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머지 부분은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조각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들기보단, 그걸로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장영규, <시대를 넘어선 소통의 예술> 노블레스 인터뷰 중
전시실2는 장영규 감독의 ‘추종자’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통 음악의 전승과 변화 과정에 주목했는데요. 24채널 판소리 전수 과정 테이프 10세트를 5개의 사운드 테이블에 나누어 저장한 다음 관람객들이 직접 헤드폰을 옮겨가며 음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소리의 기록과 저장 매체인 카세트테이프가 복사와 반복 재생을 통해 변형되고 변질될 수 있음을 암시하며, 전통을 화석화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현재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한 것이죠.
두 사람이 함께한 신작 영상도 있습니다. ‘교대- 이 세상 어딘가에’인데요. ‘교대’는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에 나오는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앞서 1978년 김민기는 ‘공장의 불빛’을 카세트테이프로 배포했는데요. 당시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찬란한 내일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자”고 독려했던 ‘공장의 불빛’은 깜깜한 밤 작은 별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2021년 가을, 임 작가와 장 감독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됐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팬데믹 속에서 이어지는 ‘교대’는 트렌디한 감각이 돋보입니다. 도입부의 영상은 지난 6월 발매된 음반 <아침이슬 50년, 김민기에 헌정하다> 중 ‘교대’를 이날치 밴드가 재해석해 연주, 녹음하는 현장을 임 작가가 촬영한 것입니다.
이후 등장하는 영상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1979년 채희완 연출의 ‘공장의 불빛’ 영상입니다. 이는 당대 집단지성의 창작물로, 연극과 노래, 탈춤 등의 장르가 혼용적으로 펼쳐지는 공연 녹화본인데요. 여기에 유튜브에 떠도는 수많은 ‘공장의 불빛’과 열화된 이미지들을 더해 자기 조직화와 자기 파괴를 통해 실재적 힘을 갖게 했습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두 아티스트의 퍼포먼스 ‘검을 현 따 지’입니다. 채희완에 의하면 탈춤은 ‘탈’을 쓰고 ‘탈난 것’을 ‘탈잡아’ 노는 춤놀이입니다. 가면을 쓰고, 재앙이나 부정적인 것을 꼬집어 밝혀내어 막힌 것을 순조롭게 풀어낸다는 것이죠.
신라 멸망 이후 화랑들이 흩어져 자신들이 수련하던 무예와 땅재주, 줄타기를 전파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탈춤과 줄타기의 기원과 포석정의 물길이 컨베이어 벨트와 겹쳐 보이는 순간 김민기의 ‘교대’가 떠오릅니다. 기술 진보와 질병의 시대라는 양 날의 칼 위에 선 노동자들의 현실과 맞물리며, 줄타기 퍼포먼스는 위태로운 시대의 흉(凶)을 알리기 위해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설화를 소환하는 셈이죠.
“모두들 자니 일 나갈 시간 얼른얼른 교대할 시간”이라는 ‘교대’의 가사는 ‘아무도 없다’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들어낸 ‘교대’는 아무도 없는 공백에 멈추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장 속에 들어있는 ‘아무개’의 의미를 돌아봤습니다. 평범하지만 켜켜이 쌓인 시간을 채워온 특별한 ‘아무개’ 무리의 힘을 말입니다. 미술가와 음악가가 함께 하는 전시의 틀을 깨고 다른 층위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전시는 11월 21일까지 이어집니다.
<2021 타이틀 매치:
임민욱 vs. 장영규 ‘교대’>2021.10.13~2021.11.21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화~금요일 10시~20시
토, 일, 공휴일 10시~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휴관
무료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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