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천문학적 규모의 미술품 기증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건희 컬렉션’이 또 한번 전국을 달구고 있습니다. 그 많은 작품을 어떻게 보관하고 알릴 것인가를 놓고 머리를 맞대온 정부와 미술계 전문가들이 지난 7일 이건희 컬렉션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후보지 2곳을 발표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유의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인근 부지와 서울시 소유의 송현동 부지인데요. 모두 서울이지요.
삼성가(家)의 미술품 기증 소식이 알려진 직후부터 대대적으로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戰)을 펼쳐온 전국 40여 지방자치단체들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됐습니다. “공청회 한 번 없이 이렇게 졸속으로 밀어붙여도 되는 거냐”는 지적부터 “이건희 미술관의 서울행(行)은 정부의 지방 분권과 지역 간 균형 발전 의지 자체를 의심케 하는 처사”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반발이 상당합니다. 최종 안착까지 넘어야 할 고비가 많아 보입니다. ‘이건희 미술관’의 최종 향배와 관련해서 정부의 7일 발표로 ‘깔끔하게’ 정리된 부분과 오히려 증폭된 논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를 분석해 봤습니다.
■ 한 곳에 모은다
무려 2만3000여 점이었습니다. 감정가만 3조에 육박하는 ‘역대급’ 기증이었습니다. ①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 측이 전국에 나눠 기증한 취지를 살려 그대로 둔다 ②근대 미술품만 분리해 국립근대미술관을 만든다 ③이건희 컬렉션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한다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기됐는데 결론은 3번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망라한 수집품의 범위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기증자의 수집 철학, 국민들이 골고루 문화 생활을 향유하기를 바랐던 기증자의 의지 등을 고려할 때 별도 공간 신설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 판단했다”(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는 건데요. 신설 공간의 명칭은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관(약칭 이건희 기증관)‘이 가장 유력합니다.
■ 지역 미술관은 달라질 것 없다
‘이건희 미술관’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이들의 주된 논거는 “이미 전국에 뿔뿔이 흩어진 이건희 컬렉션을 어떻게 다시 돌려받을 수 있겠느냐”였습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작품들이 어찌 보면 저절로 굴러 들어왔는데 순순히 다시 내어놓을 곳은 당연히 없겠지요. 이건희 컬렉션의 활용 방안을 기증 직후부터 검토해 온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위원장 김영나 서울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도 이 점은 확실하게 인식한 듯합니다. 7일 정부 발표를 보면 삼성가에서 작품과 지역의 관계, 작가의 지역 연고 등을 세세하게 고려해 수십 점씩 각 지역의 미술관들에 기증한 102점의 작품들은 향후 ‘이건희 기증관’이 들어서더라도 지금과 달라지는 게 없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2만1600여 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1400여 점 등을 대상으로 추후 논의를 거쳐 ‘이건희 기증관’에 들어갈 작품 목록을 확정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한 거지요.
■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반발은 없을까
의문이 들지요. 이건희 컬렉션이 공개됐을 때 이들도 엄청 반겼으니까요. 국립현대미술관은 모네, 피카소, 샤갈,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서양 근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포함된 기증품 목록을 받아들고 “소장 목록에 없던 거장(모네, 피카소)들의 작품도 소유할 수 있게 됐다”며 환호성을 질렀더랬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국보, 보물급 문화재들이 대거 포함된 이건희 컬렉션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죠. 이건희 기증관을 신설하면 두 기관은 어떤 형태로든 소장품의 일부 혹은 전부를 내놓아야 한다는 얘기인데 반길 리가 없겠죠. 그런데 7일 열린 정부서울청사 기자회견장에는 황희 장관과 함께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도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이건희 컬렉션 활용 방안을 검토해 온 전문가 위원회(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에 이들도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미술계에서 두 기관이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이들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갔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봐야겠지요.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 반발하는 기류는 거의 감지되지 않습니다.
■ 별도 공간 신설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기증 당시 삼성가의 발표와 수증 기관의 반응, 청와대의 ‘특별 공간 필요’ 언급, 주무부처의 움직임과 이후 미술계의 논의 방향 등을 종합해 보면 이건희 회장 유족 측에서 기증 의사를 타진했을 때 이미 정부와 미술계를 중심으로 ‘이건희 기증관’을 건립하는 방안이 수면 위로 부상했을 공산이 큽니다. 우선, 삼성가의 기증 규모가 워낙 방대했습니다. 급한 대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분리 수용하기는 했습니다만 작품의 보존, 관리와 연구, 기획 전시, 해외 교류 등 측면에서 별도 기관이 전담하는 게 훨씬 체계적이고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음직하지요. 시대와 동서양, 장르를 아우르는 작품들로 구성된 ‘이건희 컬렉션’의 특성도 한몫했습니다. 두 기관에 분산 수용해 기존 수장고와 연구 인력을 활용하는 수준으로는 기증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어렵고 다양한 작품들 간의 시너지를 꾀하는 데도 제약이 따르니까요.
■ 삼성가는 정말 뭘 원했던 걸까
삼성가의 의중, 중요하지요. 정부는 “이미 국가에 기증한 만큼, 이번 이건희 기증관 건립 결정에 삼성 측에서 어떤 개입이나 의견 제시는 없었다”고 밝혔지만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기증 취지” “기증자의 수집 철학”과 같은 표현이 답변 속에 여러 차례 등장한 것만 봐도 이건희 기증관 건립이 삼성가의 의사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향이란 점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이건희 컬렉션의 일부를 기증 받은 한 지역 미술관 인사는 “유족 측으로부터 기증 의사와 함께 보내온 기증품 목록을 받아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왜냐고 물으니 “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정말 조금도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완벽한 리스트였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다른 지역의 미술관들도 비슷했겠지요. 지역의 특수성, 부족한 점, 발전 방향까지 고려해 기증 목록을 짰다는 삼성가가 국가에 무려 2만3000점이 넘는 작품들을 기증하면서 아무런 의견도 없이 그저 “알아서 하라”고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 실제 건립까지는 ‘첩첩산중’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뛰어들었던 지역 미술계와 지방자치단체들의 반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여부가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당장 부산 해운대구 홍순헌 구청장은 지난 8일 오전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서울 지방 문화격차 가중시키는 이건희 미술관 서울 건립 방침 철회하라”며 ‘1인 시위’에 들어갔습니다. 정부는 올 연말까지 2개 후보지 중 한 곳을 이건희 기증관의 최종 부지로 확정한다는 방침입니다. 현재로선 송현동 부지가 더 유력한 상황인데요. 장소가 정해지더라도 기초조사, 설계, 건축 등의 과정을 거쳐 실제 완공되는 시점은 빨라도 2027년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는 7일 기자회견에서 스페인의 빌바오미술관을 예로 들며 소장 작품보다 멋드러진 건물의 상징성이 외지의 관광객을 끌어들여 쇠퇴해가는 도시를 살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는데요. 이건희 기증관이 빌바오미술관과 같은 ‘랜드마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계적인 도시 서울과 도시재생을 고민할 정도로 쇠락해가던 빌바오시(市)가 어떻게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반박이 뒤따를 거고요. 어느 정도의 건축비를 들여 얼마나 눈길을 끄는 디자인의 건물을 세울 것이냐, 운영 예산은 어떻게 확보할 거냐, 이건희 기증관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여부도 중요한 변수입니다. 건물만 세운다고 저절로 랜드마크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문체부 산하의 별도 기관으로 갈지, 국립현대미술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분관 형태로 갈지 여부도 아직은 미확정입니다. 전문 인력 확충 방안 등이 이 논의 결과와 연동되는 만큼 중요한 부분이지요. 좀 더 세부적으로는 두 기관이 기증 받은 ‘이건희 컬렉션’을 이건희 기증관이 전부 가져올지, 일부는 남겨놓을 것인지 여부도 결정해야 합니다.
정부는 기자회견에서 “고미술과 근현대미술로 나누지 않고 기증작품들을 이건희 기증관이라는 공간에 한데 모아 보관함으로써 미술관과 박물관의 특성을 융합한 창의적이고 새로운 형태(뮤지엄)의 ‘통섭형 운영 모델’을 시도해 보겠다”며 다소 모호하면서도 의욕적인 포부를 밝혔는데요. 모쪼록 지금까지 제기된 여러 불확실성과 지역의 반발 등을 제대로 해소해서 정부의 공언대로 이건희 기증관이 국내 미술애호가들과 외국의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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