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시작된 혼돈의 시간, 팬데믹. 예고 없이 찾아온,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달라질 미래를 기대했다. 그리고 2021년 가을, 위드 코로나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새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달라진 시간, 우리들의 일상은 어떻게 변화할까. 그리고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20년 전, 일탈을 꿈꾸는 일상의 다층적 의미를 다루었던 예술가들이 다시금 만나 코로나19로 인해 예고 없이 새로운 시대를 맞닥뜨린 오늘의 일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뭉쳤다.
10월 19일부터 2022년 2월 27일까지 서울 세화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상어, 새로이 일주하다> 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전시는 2001년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열렸던 <상어, 비행기를 물다> 전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당시 전시의 제목으로 사용된 상어는 자연물을 대표하며 길들여지지 않은 존재를 상징했다. 이번 전시 제목에 상어를 다시 사용한 것은 단어 자체로 지난 전시와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나아가 이 전시를 통해 일탈을 꿈꾸던 지난날의 상어가 오늘의 무너진 일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전시에 참여한 이들은 강애란, 김해민, 강홍구, 양아치, 그리고 리덕수 작가다. 이들의 작품은 지나온 세월만큼 깊어졌거나 혹은 또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여 나아가는 중이다. 활동에 제약을 둘 수밖에 없는 판데믹 시대에 살며 신체의 한계를 절감하는 오늘, 비틀어진 일상 속에서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다섯 작가의 눈을 빌린 전시를 통해 각각 뚜렷하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감상하는 행위를 통해 현실의 왜곡된 거리들을 다시 조정하고, 새 일상을 일주하는 각자의 방법들을 찾아갈 수 있길 바라본다. 다음은 이번 전시에 소개된 대표작들이다.
강애란 작가는 2000년대 초부터 인류 역사에서 지식의 보고로서 책이 갖는 중요한 상징성을 시대 변화에 걸맞게 해석하는 디지털 북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작가가 제작하는 책은 몰드로 제작된 투명 재료로, 내부에 조명을 삽입하여 빛난다. 종이 책의 물성에서 벗어난 책 오브제는 새롭게 도래한 전자시대를 표상한다.
특히 작가는 2015년경부터 한국 출신의 여성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주제의식을 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설치 작업에서도 여성주의 책들을 다룬다. 흑백의 책방 이미지가 전사된 공간 위로 여성주의 조명 책이 진열되고, 인터랙티브 영상을 비롯, 책 형태를 그대로 딴 캔버스 회화 작품까지 망라되어 작가의 ‘숙고의 서재’를 구성한다. 도나 헤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 텍스트가 담긴 책 표지를 만지면 다양한 여성주의 작가, 사회 운동가가 쓴 문장들이 공간에 투사된다.
강 작가가 처음 책 오브제 작업을 시작한 것은 지식의 원천인 책에 대한 경외의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쌓여온 책만큼 성숙한 사회에 도달했을까. 산적한 문제와 갈등은 여전히 일상을 어지럽힌다. 판데믹은 인류사에 다시없을 재앙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숙고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작가가 여성주의 책을 통해 보다 논쟁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유도 모두에게 문제에 직면할 것과 숙고의 시간을 가질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다.
김해민 작가는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의 계보를 잇는 한국 미디어아트 1세대다. 1980년대 초반, 지인을 통해 개인용 캠코더 카메라를 처음 접한 작가는 비디오 매체에 매료되어 작품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초기 작업부터 그의 작품에는 미디어 매체를 이용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갑작스레 흩뜨리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후로도 이어져 온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선보였던 〈R.G.B 칵테일〉의 후속작 〈RGB 칵테일–용해되지 않는 캡슐〉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 판데믹의 일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연평도 조기잡이 배는 떠났나요?〉, 영화감독 신상옥이 남과 북에서 만든 두 편의 춘향전을 엮어 제작한 〈신춘향〉, 그리고 영상과 센서, 조명을 활용하여 제작한 〈빨강 그림자 파랑 그림자–대면비대면〉 까지 총 네 점의 미디어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각기 개성이 뚜렷한 작품이지만 작가가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매체를 바라보는 관점은 상통한다.
작가는 가상의 영상 이미지를 현실 세계에 전이시키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화면을 켜면 촬영된 이미지가 전파의 흐름을 타고 스크린으로 송출된다. 미디어 매체는 몇 가지 트릭이 사용된 가상의 영상을 통해 현실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그 흐려진 경계 사이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의 작품은 가상의 것이 실재의 위상을 획득하게 된 오늘의 일상을 표상하며, 그 차이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
강홍구 작가는 목포교육대학교를 졸업한 후 6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러던 중 화가를 꿈꾸며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여 회화 전공으로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첫 개인전에서는 회화 작업을 선보였으나 미술계의 관습에 환멸을 느껴 돌연 광고나 영화 스틸 이미지를 활용하는 엉뚱한 합성 사진 작업에 돌입했고, 이후에도 주로 사진을 매체로 하여 일상에서 마주한 기묘한 풍경들을 포착하고 자신의 시각을 덧입히는 작업들을 진행해왔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는 2001년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전시했던 ‘빌딩’ 시리즈를 다시 찾아냈다. 당시 그는 일상성을 담아내기 위해 흥국생명 빌딩 내부를 일종의 삶이 소멸해가는 장소로 설정하고, 동물 형상의 싸구려 장난감 오브제를 활용해 빌딩 내부 공간과 합성하였다. 공룡처럼 큰 꿈을 안고 멋진 빌딩에 입성한 회사원들이 개처럼 열심히 일만 열심히 하다가 결국 빌딩 한구석에 쓰러진 양처럼 번아웃 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옛 작업과 함께 현재 그가 마주하고 있는 서울의 풍경을 담아낸 최근작 ‘서울–공터’ 시리즈를 함께 선보인다. 작가는 송현동 부지, 낙산 아래 창신동, 선유도 등 현재 포화 상태인 서울에 기묘하게 남아있는 공터를 사진으로 포착했다. 디지털 프린트한 사진 위에 아크릴 채색이 된 작품이다. 서울에 살아남은 공터들은 누군가의 욕망이 맞부딪힌 결과이기도, 혹은 욕망이 간신히 비껴간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녹색의 수풀과 꽃나무가 자연스레 공터를 덮었고, 현재 서울이 맞나 싶은 풍경이 작품으로 담겨 창문 밖 인왕산을 품은 도시 풍경과 함께 전시장에 놓였다.
양아치 작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인터넷, 네트워크, 디지털 기반 기술 등 급격히 발전하는 사회 변화상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새 기술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모색하는 조형 실험을 이어왔다. 작가의 작품세계가 워낙 방대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어 쉽게 정의하기 어렵지만, 대부분 그의 관심사는 기술 그 자체에 있기보다는 기술 변화에 따라 세계와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 상호 간의 네트워크 체계, 변화하는 세계와 낡은 세계 사이의 균형감각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판데믹으로 급격히 도래한 새 시대 새로운 ‘사물(thing)’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오늘의 일상에 존재하는 사물(objet)이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는 중앙 자본에 의해 돌아가는 시스템에 속하는 것이라면, 작가가 생각하는 사물(thing)은 가상 화폐와 같은 탈 중앙화된 자본으로 생성되고 유통되는 것이다. 권력구조가 이동하며 계속해서 차이가 발생하는 오늘, 가상 화폐로 대표되는 탈 중앙화된 시스템은 과연 미래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번 전시에 작가는 ‘이더리움 신체는 노동하지 않는데 56.52%가 올랐습니다’라는 제목의 설치작업을 선보인다. 아티스트 피로 이더리움 채굴기를 구입하고, 프로그램을 구축하여 전시장 내에서 실시간으로 작동시킨다. 관람객은 모니터를 통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중앙 화폐의 지원으로 탈 중앙화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며 작가의 노동을 통해 노동하지 않고도 가치가 발생하는 현장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도를 통해 작가는 빠르게 변화하는 불안정한 일상과 불확실한 미래 사이의 접점을 찾아보려 한다.
리덕수 작가는 스스로 ‘냉전의 무대, 분단의 희생자, 실향 2세대‘라고 부른다. 이번 전시에서는 새로 발간된 『리덕수포스터북–나는 이렇게 쓰였다』를 중심으로 ‘책 속으로 사라진‘ 그의 존재를 공간을 빌어 펼쳐 선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며,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인 것일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선 흩어진 단서를 모아야 한다. 모든 단서는 전시공간에 산재해있다. 우선 벽에 걸린 포스터를 살펴보자. 전형적인 북한 선전 포스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용된 문구와 인물의 모습은 남한의 현실을 풍자하는 듯하다. 북한에서 그림을 배웠으니 그 모양새를 따르지만 남한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경계 없이 뒤섞였다. 그의 포스터 작품은 마치 리덕수라는 이름을 듣고 움츠려 들었다가 ‘Redux’라는 영문 이름에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는, 분단의 현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의 정체성을 규정짓기 위해 단서들을 찾는 행위가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 얼굴 중 어느 것이 진짜 나라고 말하기 어려운 세계에 도달해 있는 것인지 모른다. 리덕수는 존재 자체로 본향 없이 정체성의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오늘의 일상 세계를 방증한다.
숙제를 하듯 전시물들을 파고들기 보다 마치 호수와 호수 사이, 레몬비가 내리는 산책로를 산책하듯 작품을 천천히 즐겨보자. 인왕산이 내다보이는 창문에는 아름다운 시가 적혀 있고, 이 시를 오래 감상할 수 있는 벤치도 마련되어 있다. 이 공간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이 정답이다.
한편 이 전시는 지난 2001년 일주학술문화재단이 후원했던 미디어아트 플랫폼 ‘일주아트하우스’의 작가 지원 사업을 이은 것으로, 태광그룹 창업주인 일주(一洲) 이임용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상어, 새로이 일주하다
(Shark, Bite the New World)>태광그룹 세화미술관 제1, 2전시실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68 흥국생명빌딩 3층)
2021.10.19 ~ 2022.02.27
화~일요일 10:00~18:00
매주 월요일/공휴일 휴관
02-2002-7787
관람료 무료
강애란, 김해민, 강홍구, 양아치, 리덕수 작가 참여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태광그룹 세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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