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명의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작가들이 모인 전시 <지구라도 옮길 기세 : As if we could lift the earth 展>가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조은정(1962년生) 이서전(‘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동창전’의 줄임말) 회장은 미술 평론가, 전시 기획자, 한국근현대미술사 학회장, 고려대학교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 아르꼬스모미술관 큐레이터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며 한국미술계에서 굵직한 역할을 맡아온 인물인데요.
이번에 또 한번 일을 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수의 작가들을 모을 수 있었을까요? ‘지구라도 옮길 기세’라는 전시 제목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요? 이서전의 조은정 회장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번 전시의 의의와 특징, 내용 등을 간략히 소개해 주세요. 어떤 생각을 갖고 이번 기획에 참여하게 됐나요.
여성들이 예술가로서 활동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작업’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반드시 필요한데요. 이런 여건을 갖추고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가들도 있지만, 모두가 미술 대학을 졸업할 때는 작가의 꿈을 갖고 세상에 나갑니다. 이런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163명의 단일 대학교 졸업생이 한꺼번에 전시를 하는 것이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대학교 졸업생부터 2021년 졸업생의 작품을 같이 놓고 보면서 한국의 여성 미술이 어떻게 변화해 왔고 어떤 세계관을 형성하게 됐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163명의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작가들이 모였습니다. 적은 숫자가 아닌데 어떻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으며 어떤 이유로 모이게 됐나요? 이들은 졸업 이후 작품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 온 전업작가들인가요?
그동안에도 동문전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기존 동문전의 2배가 넘는 수의 작가들이 참여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번 전시가 갖고 있는 의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945년에 입학해 1949년에 졸업하신 대한민국 최초 미술대학의 제1회 졸업생들까지 참여해서 더 뜻 깊은 전시를 열 수 있었습니다. 보통 ‘동문 전시’하면 친목 목적 아닐까 생각을 먼저 할 수 있는데요. 실상을 들여다보면 여성 작가들의 작업은 너무나 전투적입니다. 작품을 만들었다는 건 치열한 투쟁의 성과물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를 단순 친목 모임 정도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곡 미술관이라고 하는 1995년부터 현대미술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곳에서 전시가 열린 것도 참여 작가들에게 큰 자긍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지구라도 옮길 기세>에는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부터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된 작가들이 모두 참여했습니다. 예술가도 회사에 다니는 건 아니지만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없다면 바로 경력이 단절되어 버리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복직을 하는 것처럼 작가들에겐 작품 발표가 경력을 이어나가는 길입니다. 붓을 오랜 시간 놓고 있다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다시금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들도 있어 더 보람을 느낍니다.
많은 인원이 모인 만큼, 준비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있었던 어려움이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놀랍게도 어려운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웃음) 그동안 전시 기획자로서 많은 전시를 기획한 경험이 있는데요. 이런 대규모 전시는 보통 수많은 연락을 하는 과정에서 각종 혼선과 어려움들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신기하게도 이번 전시는 정말 수월했습니다. 여성들의 연대라고 하는 것이 역시나 가능하다는 걸 느꼈고 연대의 위력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작품을 준비하고 가져다 놓는 시간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어긴 작가들이 정말 한 분도 없었어요.
굳이 에피소드를 꼽으라면 ‘전시명 짓기’입니다. 지금까지는 ‘O회 이서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전시를 열었는데요. 기존과 달리 주제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함께한다는 의미를 좀 더 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단어를 찾았어요. 같이 이번 전시를 준비한 박혜성 부회장에게 전시 준비 상황을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단체 카카오톡 방을 본 박 부회장이 ‘지구라도 옮길 기세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겠어요? 그걸 보고 ‘이거다!’ 싶었지요. 바로 전시 제목으로 채택했습니다. 정말 멋진 전시 제목이라고 생각을 했고, 특히 ‘지구’에 의미를 많이 부여했습니다. 늘 이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고 대학 진학률도 여성이 더 높다고들 하는데 막상 사회에 진출하면 여전히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불평등이 만연해 있는 이 ‘지구’에서 여성들이 함께 연대하고 힘을 키워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을 제목에 담았습니다.
대선배인 1회 졸업생까지 참여한 전시이니깐 옛날 얘기로 좀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에서 미술 교육을 시작한 것이 1945년 10월이었고,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며 예림원 미술과는 미술학부로 개편되었습니다. 학부생들이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는 최초로 1949년 10월에 전시를 열었는데요. 전업 작가들도 아니고 학부생들이 전시를 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맞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시 대중에게 전시 소식을 알릴 수 있는 길은 신문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다행히 경향신문사와 인연이 닿아 경향신문 후원으로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는 최초로 제 1회 이화여자대학교 미술학부생들의 전시를 열 수 있었습니다. 독자들에게 아침마다 새로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신문은 동분서주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예전에 없었던 것, 새로운 것들을 보도했고 관련 행사를 주최하고 후원했습니다. 경향신문이 전업 미술가도 아닌 미술학부생들의 전시를 후원했다는 것은 아마도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 최초로 미술 교육을 받은 이화여대 학부생들을 소개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새로움을 향한 갈망이 넘쳐나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이들의 전시 역시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어 경향신문의 후원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이화여자대학교가 국내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시작한 ‘최초’의 학교라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요.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더불어 당시 ‘여성 화가’의 위상은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한국 근현대미술을 고찰하는 미술사학자로서 연구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대학에서 미술을 교육한 기관은 이화여자대학교인데 ‘서울대학교 등에서 미술 교육이 시작되고’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서 서술하고 있었습니다. 이유가 몇 가지 있을 테지만, 기록하는 자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겠죠. 서울대학교에서 최초로 미술 대학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것을 사람들이 인용하면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굳어졌다고 보는데요.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최초라고 적고 있지만 왜 다른 연구자들이 서울대학교의 기록만 사용했을까, 여기에는 아마 “여자들이 그랬을 리 없다”는 편견이 작용한 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과거부터 여성들이 그림을 그리면 ‘규수 화가’ 또는 ‘규방 화가’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의 노력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담긴 말이지요. 현대미술에 와서는 여성 작가들이 정말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데요. 그럼에도 여전히 일종의 편견 같은 것이 있습니다. ‘꽃 그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성 작가가 그리면 “장식적이다”, “예쁜 것을 그렸다” 등의 평가가 따라와요. 예술로서의 고뇌를 담지 못했다는 뜻이 숨어 있지요. 똑같은 ‘꽃 그림’을 남성 작가가 그리면 달라요. 생명력, 사회상 등에 주목한답니다. 전통적으로 예술은 남성의 영역이고 공예는 여성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지금까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세계관들이 많이 바뀌고 있는 지금, 여성 작가들이 생산해내는 작품들을 제도에 의한 편견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점차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 전시에도 많은 꽃 그림이 등장합니다. 단순히 ‘예쁜 그림’이라는 식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좀 거둬두시면 어떨까 합니다.
무려 160명의 작가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는 전시 <이서전 : 지구라도 옮길 기세>의 기간이 너무 짧아서 아쉽습니다. 많은 공을 들여 준비한 대규모 전시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한국의 전시 문화는 기본적으로 일주일, 열흘, 한 달 이런 식인데요. 초대전이나 대규모 기획전의 경우에만 한 달 이상 공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정적인 미술의 공간 속에서 전시를 연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비용이 많이 발생하죠. 열흘이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습니다. 다음에는 163명 이상의 작가들이 모여 전시 기간도 더 늘려 잡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슴속에 ‘미술’이라는 꿈을 품고 살아가는 동시대 여성 작가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여성 작가로 살아가는 것은 어디에서나 힘듭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쉽지 않고요. 미술의 꿈을 안고 언젠가 화가로 복귀할 그날을 기다리는 작가들도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지요. ‘100세 시대’인 만큼 과거보다는 조금의 시간을 더 확보한 셈인데요.(웃음) 꿈을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 기회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 경력 단절 여성들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수 있는 분야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술은 경험, 사유, 물질을 다루는 힘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어느 날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수 있는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습니다.
다들 이런 가능성을 항상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정말 힘들게 한 걸음씩 겨우 성장해 가고 있다는 점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과거보다는 현재가 낫고,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 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더 이상 여성 작가가 아니라 온전히 작가로서 인정 받는 그날을 위해 함께 꿈꾸고, 연대하겠습니다.
163명의 작가가 참여한 만큼 한정된 전시 공간에 모두의 작품을 전시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들 대형 작품을 낼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함에도 서로의 작품을 배려해 비교적 크기가 작은 작품을 걸어 달라는 민원이 ‘폭주’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 못지않게 연대의 마음이 빛을 발하는 전시입니다.
■ <이서전 : 지구라도 옮길 기세>
9월 2일(목) ~ 9월 11일(토)
10:00 – 18:00
월요일 휴무
성곡미술관(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 성곡미술관)
문의 : 02)737-7650
올댓아트 구민경 인턴
권재현 전시팀장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ㅣ이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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