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학번이라고 했다. 흔히들 ‘586’이라고 부르는 세대다. 권위주의 정권에 맞선 반독재 투쟁이 휘몰아치던 시절, 대학을 다녔다. 그 시절 청춘이라면 누구도 돌멩이와 자욱한 최루탄 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가든, 애써 외면한 채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시 공부에 매달리든 시대가 던져준 ‘운명’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젋은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군홧발에 짓밟히고 감옥을 가고 고문을 당하고 별이 되어 스러져간 동기, 선배, 후배들을 보면서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든 마음의 빚을 갚으리라 다짐하던 세대가 이른바 586이다.
당시 젊은이의 고뇌를 기록한 시를 가져왔다.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기형도 시인의 ‘대학시절’이다. 돌멩이와 최루탄이 난무하던 80년대 대학가, ‘싱그런’ 청춘의 봄은 찬란했으되 마냥 아름다울 수만은 없었다. ☞ 관련 기사 보러 가기
오늘 소개할 이동기(1967년生) 작가 역시 ‘586세대’다.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고발하고 대중의 현실참여를 촉구하는 민중미술과 제도권 중심의 추상미술이 미술계를 양분하던 시대에 미대(홍익대 서양화과)를 다녔다. 어느 쪽이든 참여하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운 시대였다. 리얼리즘(민중미술)과 모더니즘(추상미술)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제 3의 길’이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암울한 시대상이 미술계까지 무겁게 짓누르던 시절, ‘뭔가 다른 길을 가고 싶다’며 택한 대상이 ‘한가하게도’ 만화였으니 주변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외롭고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만화 등 대중문화 이미지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팝 아트’가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민국 미술의 미래가 될 거라 확신했다.
제도권과 현실참여 어느 쪽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경계인’ 이동기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에 본격적으로 만화 이미지를 도입한 1세대 작가의 작품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1993년 일본의 아톰(Atom)과 미국의 미키마우스(Micky Mouse)를 섞어 창조한 아토마우스(Atomaus)를 비롯해 다양한 캐릭터와 알록달록한 색상이 도무지 ‘586세대 화가’의 작품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기발하다. 생동감이 넘친다.
작품 소개 부탁한다.
“높이 2.4m, 길이 10m의 대형 회화 작업 <펜타곤>에 보여주고 싶은 요소를 다 담았다. 추상주의적 성격도 있고 절충주의 성격을 가미한 작품들도 있다. 해외에 소개된 한국 드라마의 장면을 캡처한 후 다시 그림으로 옮긴 ‘소프 오페라’ 등 다양한 작품들로 이번 전시를 꾸몄다.”
절충주의라 하면?
“건축 용어다. 서로 다른 양식과 스타일을 결합시켜서 건물을 짓는 기법을 말한다. 2010년부터 회화에 도입해 꾸준히 작업해 왔다. 논리적으로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내용, 스타일, 요소들을 한 작품 안에 모두 녹인다. 일종의 ‘레이어드 페인팅'(Layered Painting)이다. 좀 복잡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현대미술이 최근까지도 굉장히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여온 흐름에 대한 반발이라고나 할까.”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70년대를 풍미한 미니멀리즘 사조의 핵심은 기본 핵심 요소만 남기고 부수적이며 ‘불순한’ 요소는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다. 이를 환원주의라 부른다. 그러다 2000년대 이후 개념 미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설치 작품도 많아졌고. 언어와 아이디어를 미술의 본질로 보고 나머지는 제거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환원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내 작품은 완전히 반대 지점에 서 있다. 핵심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다 갖다붙여서 복잡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흐름이다.”
한국 팝 아트 1세대 작가로 불린다.
“대학 다닐 때 우리나라 미술은 민중미술과 추상미술의 두 흐름으로 나뉘어 있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결 구도였다. 추상 미술은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수들 중심으로 널리 퍼져 아카데미즘으로 불렸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민중미술은 반제도권, 반아카데미즘을 지향했다. 저항하고 도전하는 형태였지만 이들도 미술계 내에선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한 ‘거대 세력’이었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민중미술의 작품 경향을 많이 배우고 학습했지만 점차 ‘뭔가 다른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만화 이미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만화를 좋아했다. 80년대는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대중문화가 획기적 발전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추상미술이나 민중미술 모두 대중문화는 ‘뭔가 격이 낮고 순수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순수미술과 대중문화 사이에 큰 장벽이 놓여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흐름을 깨고 싶었다. 대학 다닐 때부터 만화 이미지를 가져와 실험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졸업 후 연 전시회에서 본격적으로 발표했다. 근엄하고 우아한 전시회에서 얼핏 보면 ‘수준 낮고’ 엉뚱한 작품을 펼쳐 놓으니 이상하게 여기며 거부감을 보이는 관람객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앤디 워홀 전시가 흥행몰이를 이어가는 등 국내에도 팝아트 붐이 일었다. 팝 아트를 하겠다고 나선 작가들도 많아졌고. 대중문화를 하위문화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제 많이 사라졌다.”
좋아하는 작가는?
“1980년대 미국 뉴욕을 휩쓴 포스트 모너니즘 사조를 이끌었던 장 미쉘 바스키아, 키스 해링, 앤디 워홀, 제프 쿤스, 신디 셔먼 등을 좋아한다. 이들의 작품을 미술잡지나 매체를 통해 끊임 없이 탐색하고 연구한다.”
이번 전시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세상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작품의 서사구조가 완결된 것도 아니다. 기존의 작가들이 예술작품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의미마저 직접 결정하려고 했다면 나는 아니다. 어떤 작품의 의미까지 작가가 관객들의 마음을 100% 통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작품을 만드는 건 작가이지만 그 의미를 해석하고 느끼는 건 관객들의 영역이다. 미술품은 물건과 다르다. 작가가 마음을 작품에 담았더라도 작품의 움직임에 따라 그 의미는 새로 발생했다가 소멸하고 전혀 다른 의미를 또 다시 생성하기도 한다. 물처럼 흘러가는 과정을 통해 작품의 의미가 더 풍부해진다고 생각한다.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자신만의 서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궁금한 게 있다. 어찌 보면 ‘불순물’ 덩어리를 왜 여기저기 갖다붙여서 작품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인가. 심지어 각 요소들 간의 이해관계도 전혀 성립하지 않고 충돌한다.
“부수적인 걸 제거하면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게 기존 사고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낸 게 본질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너무나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의 환경이나 세태를 보면 어떤 사안에서 본질을 뽑아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인터넷, 가상현실 등 기존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가 계속해서 열리고 있다. 과잉 정보, 과잉 이미지 세상을 향해 달려간다. 이런 상황에서 이전 세대가 생각했던 본질, 핵심이란 게 과연 계속해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본질을 제시하기보다 계속 모호하고 복잡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건 세상의 이런 흐름에 대한 일종의 문제 제기 차원이다.”
■ 이동기 개인전 <펜타곤 PENTAGON>
2021. 5.27(목) ~ 2021. 7.17(토)
화~토 11:00 – 18:00
피비 갤러리(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125-6 1층)
문의 : 02)6263-2004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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