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가옥을 보신 적이 있나요? 보통 일제강점기에 나무로 지어진 일식 가옥이나, 1930년 이후 일본과 서양 양식을 결합하여 지어진 ‘일양 절충식’ 가옥 등을 통틀어 근대가옥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부산이나 포항, 목포 등 지방 곳곳에는 아직 이러한 근대가옥들이 꽤 남아 있지요.
최근 들어 근대가옥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근대가옥을 허물고 일대를 개발하거나, 근대가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카페나 펜션 등 상업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인데요. 근대가옥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지만, 사유 재산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소유자가 자발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소멸을 막기가 쉽지 않습니다.
근대가옥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그 ‘건물’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간이 담고 있던 이야기도 함께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간의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뼈대만 상업적 공간으로 재탄생한 근대가옥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그 집이 지나온 시간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시티즌랩_별별별서>는 1954년 동명동에 지은 근대가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광주 동구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 명은 ‘별별별서’, 가옥 명칭은 ‘인문학당’으로 정했습니다. 38명의 작가팀은 근대가옥을 별별기억, 별별정원, 별별마루, 별별다실, 별별부엌, 별별소통 등 6개의 테마로 구성해 아카이브, 설치, 공예, 영상 등 다채로운 예술 작품으로 공간을 채웠습니다. 작가들은 근대가옥을 여러 번 방문하고, 팀원들과의 치열한 토의를 거쳐 작품을 완성했는데요. 가옥의 이야기에서 주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곳의 작품들은 서서 감상만 하는 작품들이 아닙니다. 직접 만져보고, 앉아보고, 사용해 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방문하는 시민 누구나 작가가 만든 다기로 차를 마시고, 작가가 만든 레시피와 조리 도구로 요리도 하고, 작가가 만든 의자에 앉아 음악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올해 9월로 예정된 근대가옥 ‘인문학당’ 공개에 앞서, 참여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을 미리 볼 수 있는 ‘공공미술 시티즌랩_별별별서 프리뷰’전이 지난 4월 22일부터 5월 28일까지 광주의 궁동 미로센터 일원에서 열렸습니다. 올댓아트가 프리뷰 전시 현장을 찾아가 정유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하 정)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공간과 지역,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공공의 힘’을 모은 막전막후의 과정, 지금 공개합니다.
광주 공공미술 프로젝트 <‘시티즌랩_별별별서’>
이번 광주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기존에 존재하는 공간에 작품을 전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공간 자체를 변화시킨 것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동명동 근대가옥’을 프로젝트 공간으로 선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 동명동 근대가옥은 1954년에 지은 집이에요. 한옥을 기반으로 일본, 서양풍의 건축 양식을 아울러 독특한 양식으로 지었어요. 이 주택을 동구청에서 매입했고, 어떤 용도로 활용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고 해요. 건물을 헐고 주민센터나 주차장을 만들자는 말도 있었고, 게이트볼 경기장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죠.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건물을 보존하자는 의견이 가장 많았어요. 공동의 경험과 기억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이야기였죠. 시민들의 이런 의견을 반영해서 동명동 근대가옥을 이번 프로젝트 대상지로 선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주관처로서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텐데 정말 의미 있는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해요. 공공미술이라고 하면 보통 벽화나 조형물 같은 개별 작품을 먼저 떠올리게 되잖아요. 지역의 오래된 가옥을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혁신이라고 생각해요.
근대가옥이 아니라 미로센터에서 프리뷰 전시를 열었는데 이유가 있나요. 프리뷰 전시 준비과정이 궁금합니다. 프리뷰 전시를 통해 기대하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정 근대가옥에서 직접 보여드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기한이 촉박하다 보니 아직 공간 공사를 전부 마무리하지 못했어요.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먼저 나누고 싶어 프리뷰 전시를 열었습니다. 프리뷰의 중요한 역할이 또 있어요. 첫째,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분들과 작품을 한데 모아 다시 보고, 이것을 앞으로 근대가옥 공간에 어떻게 배치되고 활용할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중간 점검의 목적이 있고요. 둘째, 프리뷰 전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문학당을 더 많이 알리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번 전시가 예고편인 셈이죠. 9월에 완공 예정인 ‘인문학당’ 공간 많이 사랑해주시고 꼭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시티즌 랩 : 별별별서]는 ‘별별기억, 별별소통, 별별마루, 별별다실, 별별정원, 별별부엌’ 이렇게 총 6개의 팀으로 구성한 것으로 아는데, 각 팀 소개 부탁드립니다.
정 별별기억과 별별소통은 근대가옥 공간의 이야기를 전하는 팀이에요. 과거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앞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새롭게 꾸려 나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별별기억 팀은 기존 집이 갖고 있던 이야기들, 즉 버린 물건들을 활용해 공간을 채웠어요. 업사이클링을 통해 샹들리에와 가구를 제작했고 실제 이 집에 거주했던 분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사진과 텍스트로 남기기도 했지요. 별별소통 팀은 별별별서의 홍보를 맡고 있어요. SNS 운영, 지역적 스토리를 활용한 애니메이션 제작, 굿즈 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인문학당을 알리고 있습니다.
정 별별마루는 소규모 모임, 행사장, 전시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목적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작가팀인데요. 이곳에 들어갈 조명과 유리창, 병풍, 수납장까지 작가님들이 정말 열심히 만들어 주셨어요.(웃음) 별별다실은 누구나 와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에요. 찻잔부터 가구와 공간 인테리어까지 구석구석 ‘별별다실’ 작가님들의 손길이 닿아 있답니다. 별별정원은 집 앞에 있는 야외 공간이에요. 수경 공간 테이블과 기존 정원석을 활용한 디딤돌 등을 놓을 예정이고요. 마지막으로 별별부엌은 시민들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개방형 부엌인데요. 모든 식기, 조명, 가구 등을 ‘별별부엌’ 작가님들이 정성을 다해 만들었어요. 다식 레시피를 개발하고 광주의 지역 문화을 담은 차를 만든 작가님도 있어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분들의 협업으로 공간을 다채롭게 채울 수 있었어요.
작업 과정이 궁금해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 주세요!
정 정말 애정을 갖고 임한 프로젝트라서 그런지 그간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네요.(웃음) 프로젝트를 위해 작가, 주민분들과 함께 소통했던 과정들이 기억에 남아요. 코로나 때문에 다 같이 직접 모이는 게 어려워서 소규모로 모이거나 zoom으로 여러 차례 회의를 열었거든요. 한 공간 안에 여러 작가의 작품이 들어가는 거라, 작품들이 공간에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서로 배려를 많이 했습니다. ‘다른 작가가 이 색깔을 쓰니까 나는 이 색깔과 잘 어울리는 이 색깔로 작업해야겠다’라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죠. 이런 배려가 쌓이고 모여 공간과 잘 어울리는 멋진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주민들과 작가들이 공간을 어떻게 운영할지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는데요. 정말 많은 토론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신발을 벗고 들어갈 것인지 신고 들어갈 것인지’ 이야기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신발 착용 여부에 따라 설계나 가구 배치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더 오래 고민했던 것 같아요. 단순한 ‘신발’ 결정이 아니라 이 공간을 실질적으로 활용할 시민들을 생각했습니다. 공공의 합의를 통해서 공간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도 공공미술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간을 고려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정 어려운 점은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했다는 거요. 작가마다 작업 속도가 다른데 전부 맞춰야 하니까 그 부분이 힘들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힘들었던 만큼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한 작가분은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며 이 경험이 앞으로 다른 작업 과정에도 많은 영향을 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처음엔 공공미술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아 어려웠는데 계속 생각하고 탐구하다 보니 작품의 사회, 문화, 정치적 배경도 고민해 볼 수 있어서 뜻깊었다는 작가분도 있었고요. 다른 작가분은 개인 작업에만 몰두하다가 여러 사람과 협업하며 다양한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지점이 좋았다고 했습니다. 공공을 위한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목적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예술가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작업의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앞으로 해나갈 작업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요? 누군가의 희생으로 나오는 결과물은 결코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공공미술을 통해 예술가와 시민 모두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번 별별별서 프로젝트가 좋은 선례로 남아서 앞으로 추진할 다른 공공미술 프로젝트들도 이런 방향으로 잘 꾸려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공공미술이 시민들에게 환영받으면서 오랫동안 지속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정 사실 오랫동안 지속되는 공공미술을 작업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고, 짧은 기간 내에 고민하고 만들어낸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초기에는 공공미술이 조형물이나 벽화 위주로 굴러가다 보니 예술을 도시 미화의 목적으로만 활용한 사례들이 많았잖아요? 좋은 작업도 있었지만 행정적으로 여러 제약이 뒤따르다 보니 진짜 그 지역과 공간을 깊이 있게 고민한 뒤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일이 드물었죠. 그런 점에서 별별별서 프로젝트가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공공미술을 조금은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작가분들도 이번 프로젝트에 긍정적으로 참여해 주셨던 것 같아요. 모두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거든요. 과시하거나 공간을 압도하는 작품보다는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고, 시민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배려의 미학’을 실천해 주신 작가분들이 너무 고맙죠. 심지어 대단히 아름답기까지 하고요.(웃음)
앞으로 ‘인문학당’이 시민들에게 어떤 공간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나요?
정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기까지 정말 많은 분들이 마음을 다하여 참여해 주셨어요. 작가분들뿐만 아니라 주관처, 희망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참여해주신 지역민들까지 많은 분들의 노력이 들어간 프로젝트입니다. 모든 분들의 가치와 생각을 존중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동명동이라는 지역이 상업지구, 주택, 관공서 등 다양한 성격을 가진 동네잖아요. 다양한 문화와 가치를 존중하면서 노동과 쉼이 어우러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여행객, 방문자, 원주민들이 모두 함께요. 궁극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하는 시민 참여 공간으로 거듭나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죠.
마지막으로 ‘인문학당’을 기대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정 9월에 완공될 ‘인문학당’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 ‘별별별서’의 작품들을 체험해 보시고 즐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 2020 공공미술 프로젝트
‘우리동네미술’ <시티즌랩_별별별서>주최 : 문화체육관광부, 광주시
주관 : 문화체육관광부, 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 동구
협력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상 : 총 38명의 참여 작가
(회화, 설치, 공예, 조경, 디자인, 기획 분야)
올댓아트 김희주 인턴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 | ‘시티즌랩_별별별서’팀 제공
콘텐츠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