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국내 최대 사립 미술관 리움이 지난 8일 다시 문을 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휴관에 들어간 지 1년 7개월 만이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터진 국정 농단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홍라희 리움 관장과 홍라영 부관장의 동시 사임으로 기획전 없이 상설전만 운영하는 등 사실상 개점 휴업에 돌입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4년여 만의 재개관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의 기증품(이하 ‘이건희 컬렉션’)이 미술계 안팎에 불러온 열풍과 맞물려 올해 들어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한 국내 미술시장에 또 하나의 호재가 등장한 셈이다.
리움의 재개관 작업은 고 이건희 회장의 차녀인 삼성복지재단 이서현 이사장이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간 리뉴얼 작업 실무는 이 이사장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 동문인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총괄을 맡았다. 이 이사장은 아직 무대 전면에 본격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삼성미술관 리움의 운영위원장으로서 올해 들어 국립현대미술관 후원회에 가입하는 등 보폭을 넓히고 있어 조만간 홍라희 전 관장의 뒤를 이어 그룹 내 미술 관련 사업을 이끌 총괄책임자로서의 위상을 공식 선언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시 기획 방향도 종전의 명작, 명품 중심에서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발굴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 소개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길 것이라고 리움은 밝혔다.
리움은 재개관을 기념해 기획전을 올해 말까지 무료로 운영할 예정이다. 일반 대중의 예술 문화 향유 기회 증대 차원에서 상설전은 앞으로 상시 무료 개방키로 했다. 오랫만의 재개관인 만큼 인테리어 등 인프라도 확 바꿨다.
먼저 미술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로고를 ‘이건희 회장의 개인 미술관’이라는 느낌을 줬던 ‘리움(Leeum)’에서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심볼 형태의 새로운 MI(Museum Identity)로 교체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겠다는 의지와 미래 핵심 가치를 담은 표현이다.
로비 공간도 로툰다(원형 홀)를 중심으로 재편하고 미디어 아트 등을 소개하는 초대형, 초고화질의 ‘미디어 윌’, ‘디지털 가이드’, ‘리움 DID’ 등을 설치해 디지털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했다. 미디어 월은 화질 5000만 화소 이상, 크기 11.3×3.2m(462인치)인 최상의 디스플레이로, 다양한 장르의 한국 작가 60명의 작업 공간과 예술 세계를 인터뷰한 <리움, 작가를 만나다>를 상영 중이다.
재개관을 맞아 최근 리움을 다녀왔다. 이미 다녀온 분들도 계시겠지만 코로나 방역수칙에 따라 한정된 인원만 관람이 가능한 만큼 사전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아직 못 본 분들을 위해 현장 방문 후기를 핵심만 추려 소개한다.
전시의 축은 한국 고미술 상설전과 현대미술 상설전, 그리고 인간을 주제로 한 재개관 기획전 등 크게 세 가지다. 기획전을 먼저 둘러본 다음 고미술 상설전, 현대미술 상설전의 순서로 관람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묵직하면서도 현란한 주제의 현대미술 작품(기획전)을 보느라 다소 들뜬 마음을 고미술 작품들을 보며 차분히 가라앉혔다가 다시 한 번 현대미술의 매력 속으로 들어가 다채로운 면면을 즐기며 관람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다. 물론, 정답은 없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다.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둘러봐도 무방하다.
기획전의 제목은 <인간, 일곱 개의 질문>이다. 눈치 챘겠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시대상을 반영한 주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Ⅲ>(1960)과 안토니 곰리의 <표현>(2014), 조지 시걸의 <러시 아워>(1983) 등 서 있는 인간을 묘사한 조각상들이 전시장 입구에서 관객들을 맞는다. 셋 다 가격 산정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고가의 작품들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국내외 작가 51명이 모든 예술의 근원인 인간을 돌아보는 작품 130여 점을 펼쳐 놓았다.
20세기 중반의 전후 미술을 필두로 휴머니즘의 위기와 포스트 휴먼 논의를 거쳐 21세기의 급변하는 환경과 유례 없는 팬데믹 상황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고찰하고 미래를 가늠해 보는 전시다. 내년 1월2일까지 이어진다.
로비로 돌아와 구석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한국 고미술 상설전>이 시작된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국보급 보물들이 수두룩하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국보 ‘청자상감 운학모란국화문 매병’,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 김홍도의 ‘군선도’, 고려말-조선초에 제작한 유일한 팔각합인 ‘나전 국화당초문 팔각합’ 등 시선을 떼기 힘든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4층의 고려시대 청자를 시작으로 나선형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3층의 조선 왕실의 도자기인 ‘백자청화 운룡문호’와 분청사기 및 달항아리, 2층의 한국 고서화(정조의 대규모 행차를 정교하게 묘사한 ‘환어행렬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석란도 대련’ 등 감상의 목적으로 제작된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를 전시 중이다)를 거쳐 1층의 공예 섹션(오랜 역사를 지닌 불교미술과 아름답고 화려한 빛과 색들이 향연을 펼치는 공예품 43점을 전시하고 있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에 따라 모두 160점(국보 6점, 보물 4점, 현대미술 6점)을 관람하는 구조다.
군데군데 정상화, 박서보, 아니쉬 카푸어, 요시오카 도쿠진 등 현대작가의 작품을 배치해 시공간을 초월한 작품 해석을 시도했다. ‘청자 소품’, ‘청화백자 연적’ 등을 위한 특별 전시 공간도 만들어 전통 미술 감상의 재미를 더했다.
오랜만의 재개관인 만큼 한정된 공간에 지나치게 많은 작품을 담으려 욕심을 낼 법도 한데 그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못 보고 지나친 작품은 없나 싶어 관람객들이 전시공간을 왔다갔다해야 하는 수고를 많이 덜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다시 로비. 이번엔 <현대미술 상설전>으로 발길을 옮길 차례다. 현대미술을 열린 시각으로 해석하고 즐길 수 있는 세 개의 특별한 주제로 꾸민 공간이다. 삶과 예술에서 그 어느 색보다 풍성한 의미의 해석이 가능한 검정색의 세계를 살펴보는 ‘검은 공백’, 비물질의 세계로 확장된 미술을 보여 주는 ‘중력의 역방향’, 예술의 무한한 상상력을 확인시켜 주는 ‘이상한 행성’ 등의 주제로 모두 76점을 전시한다.
아니쉬 카푸어, 올라퍼 엘리아슨, 루이스 부르주아, 살바도르 달리, 이승조, 이불,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작품 등 출품작의 절반 이상이 리움 상설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 강렬함을 더했다.
■ 리움미술관 관람 안내
관람 예약 : 리움미술관 홈페이지(www.leeum.org)
*관람 2주 전부터 온라인 예약(시간당 75명, 일 600명)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단체예약은 잠정 중단
관람료 : 무료
관람 시간 : 10:00 – 18:00(매표 마감 17:30)
*휴관/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과 추석 당일
위치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55길 60-16
문의 : 02)2014-6901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ㅣ삼성미술관 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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