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올해 마지막 국내 단독 리사이틀이 열립니다. 지난해 가을에 있었던 전국 11개 도시에서의 투어 이후 약 10개월 만에 열린 올해 전국 투어는 7개 도시에서 진행되었는데요. 올해 공연 모두 작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살벌한 속도로 체감 시간 0.001초 만에 매진되었습니다. 아쉬워하는 팬들, 한 번쯤 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보고 싶은 이들, 그리고 “도대체 조성진의 연주가 얼마나 좋길래?” 궁금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올해 투어의 마지막 공연(서울 앙코르)이 9월 18일 오후 5시 온라인으로 생중계됩니다. 18일 밤 11시까지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조성진의 한국 공연이 온라인 생중계되는 것은 그의 데뷔 후 이번이 처음입니다.
▲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서울 앙코르 공연 온라인 감상하기
조성진은 지난해 전국 투어에서 슈만 ‘숲의 정경’, 시마노프스키 ‘마스크’,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등을 연주했는데요. 폭풍처럼 몰아치는 음악으로 전국의 관객들을 열광하게 했던 그가 올해는 야나체크, 라벨, 쇼팽의 곡을 선택했습니다.
프로그램이 공개되자마자 반응이 뜨거웠던 것은 당연합니다. 야나체크의 피아노 소나타는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지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은 아니어서, 지난해 시마노프스키의 ‘마스크’ 연주 때처럼 미처 몰랐던 명곡을 재발견하게 되리란 기대감이 컸고요. 쇼팽의 스케르초 전곡은 원래도 유명한데다 최근 조성진이 발매한 새 앨범 <쇼팽(Chopin,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4개의 스케르초)> 수록곡이자 조성진의 음색, 연주 스타일이 십분 발휘되는 작품이거든요.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명곡이자 난곡인 이 곡은 4-50년 피아노를 연주한 전설적인 연주자들의 노련한 연주로 듣는 것도 좋지만, 피 끓는 20대 피아니스트의 한창 팔팔한(?) 연주로 듣는 즐거움이 있는 작품입니다. 조성진 스스로도 최근 있었던 기자간담회에서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는 내가 연주한 피아노 솔로 곡 중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곡이다. 앞으로도 많이 연주하고 싶다. 특히 젊을 때. 나이가 들어서는 못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까다롭고 힘들고, 또 한편 그가 밝힌 대로 “음악적으로도 거의 완벽한 곡”이기도 합니다.
에디터는 지난 9월 12일 열린 경기아트센터에서의 리사이틀에 다녀왔습니다. 경기아트센터는 어느 좌석에서도 시야가 탁 트여 있어 공연 보기가 편했고, 피아노 소리가 물을 먹지 않아 피아니스트의 연주 소리를 있는 그대로 생생히 감상할 수 있었는데요. 연주가 끝난 후 프로그램 구성을 다시 보니 ‘이래서 이렇게 선택했구나’ 싶은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이번 공연에는 지금 20대 후반의 조성진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었습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이 곡이 시작하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굉장하고, 충격적이고, 놀라운 연주였습니다.
건반에서 빛이 나는 듯한 특유의 아름다운 소리와 신기에 가까운 기술은 물론이고, 여전히 강한 힘과 몰입도, 심지어 더 섬세해진 표현력까지,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10개월 전보다 한층 깊어진 음악성과 함께 그새 조금 더 자유로워진 연주 스타일의 변화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공연에서 산 정상에 오른 듯했다면 이번에는 그 산 정상에 한창 집을 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한편으로는 같은 피아노의 같은 음으로 어떻게 야나체크, 라벨, 쇼팽의 곡에서 각기 다른 느낌의 소리를 만들어내는지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제 곧 올해 한국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열리는 만큼, 오늘은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지난 경기아트센터 공연을 리뷰하며 이번 공연 프로그램 곡의 감상 포인트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 중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현장에서 본 분이 계시다면, 18일 공연을 함께 할 온·오프라인 관객들을 위해 여러분이 느낀 점도 함께 댓글로 나누어 주세요!
야나체크 피아노 소나타 ‘1.X.1905’
▲ 야나체크 피아노 소나타 ‘1.X.1905’ (조성진 연주)|Youtube
클래식 음악회에서 얻는 즐거움 중 하나는 몰랐던 명곡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이번 공연에서는 야나체크의 피아노 소나타가 그런 곡이었습니다. 야나체크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대중적으로 아주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저 유명한 드보르자크,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가입니다. 1854년에 태어나 1928년에 사망한 비교적 최근 사람(?)이고요.
야나체크는 모라비아, 그러니까 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난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 민속음악학자였으며 출판인 그리고 음악교사였습니다. 대표작은 <예누파>, <죽은이의 집에서> 등의 가극인데요. 모라비아의 전통 민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모라비아 지방의 민요를 수집해 출판하고, 민요의 선율이나 리듬 위에 독자적인 양식의 작품을 쓰는 등 민족성이 두드러지는 음악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그가 이 작품을 쓴 동기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곡명 뒤에 붙은 부제 ‘1.X.1905’는 날짜 1905년 10월 1일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체코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중심도시 브르노에서 “체코어를 쓰는 대학을 설립하라”고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는데요. 군대에 의해 집회가 진압되는 과정에서 젊은 청년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야나체크가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쓴 곡이 바로 이 피아노 소나타입니다.
이 곡은 ‘예감’과 ‘죽음’의 두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3개 악장이었는데, 마지막 악장은 초연을 듣던 야나체크가 파기해 버렸다고 하지요. 계절 탓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은, 이 곡이 연주되던 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것은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악상과 함께 이 곡의 슬픔과 분노가 엉킨 복잡한 감정을 특히 잘 살려 연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자 여러분 중 영화 <피아니스트>를 인상 깊게 본 분이 있다면 이 곡을 꼭 한 번 들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라벨 ‘밤의 가스파르’
이번 공연의 다른 프로그램 곡(야나체크, 쇼팽의 곡)과 달리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하는 영상은 유튜브에 없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보 포고렐리치가 연주하는 ‘밤의 가스파르’ 영상을 아래에 덧붙입니다. 시작이 1곡 ‘온디네’, 7분 36초 부터 2곡 ‘교수대’, 14분 28초부터 3곡 ‘스카르보’입니다.
▲ 라벨 ‘밤의 가스파르’ (이보 포고렐리치 연주)|Youtube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는 피아니스트를 극한으로 몰아세우는 곡입니다. 곡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더 해! 더 해 봐!” 조성진이 이 곡을 완벽하게 연주한 것도 놀라운데, 이 곡 연주를 마치고 라벨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와 쇼팽의 스케르초, 앙코르까지 다섯 곡이나 더 연주했다는 게 아직도 솔직히 신기합니다. 제일 신기한 건 이 곡을 두 손으로 연주했다는 거예요. 도대체 얼마나 어렵길래 이러나, 살펴보기 전에 라벨을 먼저 만나 볼까요. 라벨은 어떤 음악가였을까요.
라벨은 프랑스의 작곡가입니다. 라벨도 그렇게 옛날 사람은 아니에요. 1875년에 태어나 193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물의 유희’,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등이 있는데요. 배우 송강호·공유 주연의 영화 <밀정>에 삽입된 ‘볼레로’도 라벨의 곡입니다. 라벨의 아버지는 굉장한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그 영향과 아버지의 교육열 덕인지 라벨은 재능을 일찍 꽃피웠고, ‘물의 유희’를 발표한 26세 즈음부터 독특한 작풍의 신진 작곡가로 금세 유명해집니다.
▲ 라벨 ‘물의 유희’ (조성진 연주)|Youtube
▲ 라벨 ‘볼레로’가 삽입된 영화 <밀정>의 한 장면|Youtube
프랑스 작곡가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아마 ‘달빛’의 작곡가 드뷔시가 아닐까 싶은데요. 학생 때의 라벨도 드뷔시를 무척 존경했고, 드뷔시의 또 다른 대표작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음악사상 최대의 걸작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곡 활동을 하고 음악을 배워나가면서 라벨의 생각이 조금씩 바뀝니다. 드뷔시로 대표되는 인상주의의 한계를 깨닫게 된 거지요. 그래서 라벨의 음악을 들어보면 어떤 심상과 장면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하고 또 대담하다는 점은 드뷔시와 비슷한데, 드뷔시의 음악처럼 아주 몽환적이고 꿈결같지만은 않습니다.
▲ 드뷔시 ‘달빛’ (조성진 연주)|Youtube
음악 활동을 이어나갈수록 라벨의 작품은 점점 프랑스 고전음악처럼 명확하고 간결한 형식 안에서 작곡되는데요. 인생 후반부에 작곡한 ‘볼레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볼레로’에서 보이는 것처럼 라벨의 작품에는 우리가 흔히 프랑스 음악에서 기대하는 감성보다 살짝 이국적인 느낌도 있는데, 이는 그가 스페인 계통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페인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라벨은 이렇게 실력 좋은 작곡가여서 그렇게 어려운 곡 ‘밤의 가스파르’를 쓴 것이었을까요. 라벨이 3개의 곡으로 구성된 ‘밤의 가스파르’ 중 특히 3곡 ‘스카르보’를 어렵게 쓰려고 작정하고 어렵게 쓴 건 맞는데, 그 목적이 능력 과시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라벨은 보수적인 음악계 관료주의에 불만이 컸습니다. 한창 작품 활동을 하던 때의 라벨은 이미 꽤 인정받는 작곡가였지만 소위 잘나가는 작곡가들이 수상하던 ‘로마 대상’을 두 번이나 받지 못했고, “아카데믹한 곡을 쓰지 못한다”는 비난에 시달렸거든요. 지금 보면 라벨이라는 이 뛰어난 음악가의 작품들은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사이의 징검다리와도 같았는데 말이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의 삶은 고달픈 법인가 봅니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는 이런 개인적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음악적 능력은 앳된 티를 벗었고, 내면에는 분노와 고뇌가 끓던 라벨이 그의 음악을 악보에 (정교하게) 쏟아낸 작품인 것이지요. 클래식 연주곡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가사가 없어 마음껏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밤의 가스파르’는 그런 자유를 기꺼이 주는, 피아노로 구현 가능한 모든 기술력과 표현력의 집약체입니다.
‘밤의 가스파르’가 그리 어렵다니, 도대체 뭐가 어렵다는 건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쉽게 이야기하자면 약 25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10개 손가락의 미세한 근육 하나하나를 아주 섬세하게 움직이면서도, 양손은 건반의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를 쉴 새 없이 오가야 하고, 도-레-미-파-솔-라-시의 7개 음 중 6개의 음을 반음 올리라 했다가 바로 내리라 했다가 같은 음을 연달아서 80번(!) 넘게 누르되 소리의 크기는 흔들림 없이 균일하게 유지하라고 하는 등 까다로운 요구를 쏟아내는 라벨을 만족시켜야 하는 그런 곡입니다. 그러면서도 페달을 밟는 양 발의 긴장 역시 놓쳐서는 안 되고요. 이 곡으로 음악계에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인가 싶을 정도로 곡 전반에 독기가 서려 있습니다.
드뷔시의 ‘달빛’이 프랑스 레퍼토리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 ‘밤의 가스파르’라는 제목만 들으면 비슷한 이미지를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전혀 반대입니다. 을씨년스럽거든요. 라벨은 이 차가운 작품 ‘밤의 가스파르’의 영감을 프랑스의 시인 베르트랑이 쓴 동명의 산문시에서 얻었습니다.
베르트랑은 몹시 가난하게 살았고, 저널리스트로서도 실패했고, 몸도 병약해 짧은 생을 살은 와중에 산문시 ‘밤의 가스파르’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시에도 피아노곡에도 전반적으로 상당히 음울한 분위기가 깔려 있는데요. 이 시는 비단 라벨뿐만 아니라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에게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보들레르도 이 시에 감동받아 최소 스무 번 정도를 읽고,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을 썼으니까요. 이하에서는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를 어떻게 연주했는지와 함께, 베르트랑의 시 ‘밤의 가스파르’ 본문도 소개하겠습니다.
온디네
“들어봐요, 들어봐요! 부드러운 달빛에 비친 당신의 유리창에 물방울을 흩뿌려 울리게 하는 것은, 나 물의 요정이랍니다. 그리고 여기 무지갯빛 가운을 걸친 저택의 아가씨가 발코니에 서서 별이 총총한 밤의 아름다움과 잠든 호수를 바라보고 있어요. 흐름을 헤엄치는 물방을 하나하나가 물의 요정이고, 흐름의 하나하나가 나의 거처로 가는 오솔길이며, 그리고 나의 거처는 깊은 호수 속에 불과 흙과 공기의 세모꼴 속에 물로 만들어져 있죠. 들어봐요, 들어봐요! 나의 아버지는 푸른 버드나무 가지로 물가를 찰랑거리고 계시죠. 그리고 나의 자매들은 그 물거품의 팔로 물백합과 글라디올러스가 우거진 푸른 풀의 섬을 쓰다듬고, 수염을 드리우고 구부정하게 강물에서 낚시하는 버드나무를 놀려대지요”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나에게 애원했다. 그녀의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고 물의 요정의 남편이 되어 그녀의 거처에 와서 호수의 왕이 되라고. 그리고 나는 인간 여성을 사랑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샐쭉해져서 투정 부리며 나지막하게 울고, 갑작스럽게 소리 내어 웃더니 물방울이 되어 나의 푸르스름한 창문을 타고 하얗게 흘러내려서는 이내 흩어져 버렸다.
온디네는 ‘물의 요정’입니다. 물의 요정이라고 하니,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했나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온디네는 아름답기는 한데, 이 인간을 유혹해 호수 아래 자신의 세계로 끌고 가려 하거든요. 인간 입장에서 보면 물에 빠져 죽는 거예요.
잔잔한 물결이 아름답게, 한편 싸늘하게 그려지는 도입부는 피아노로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물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라벨의 ‘물의 유희’에서 드러난 물의 질감 표현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이 ‘온디네’가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시 마지막에 “그녀는 샐쭉해져서 투정 부리며 나지막하게 울고, 갑작스럽게 소리 내어 웃더니 물방울이 되어 나의 푸르스름한 창문을 타고 하얗게 흘러내려서는 이내 흩어져 버렸다”라는 구간이 그대로 음악이 되어버린 것 같은 라벨의 ‘온디네’ 마지막 구간에서는, 요정의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지요.
‘스카르보’에서처럼 ‘온디네’에도 음을 빠르게 연주하는 구간이 있는데, 조성진은 그 구간에서 건반을 어영부영 속도대로 주르륵 훑는 것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하나하나 정확하게 누르면서도 건반 위에 물을 흘려보내듯 가벼운 느낌의 맑은 소리로 연주했습니다. 도입부는 꿈꾸는 느낌이었고요. 건반으로 이보다 더 물의 움직임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가 있을지, 라벨이 악보에 담은 물의 질감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조성진의 표현력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정말로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 모습이 그려졌거든요.
교수대
아! 내가 들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밤바람의 음산한 울림이었던가? 아니면 교수대에 매달린 죽은 이의 한숨인가? 아니면 그것은 나무가 불쌍히 여겨 보호해 주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었던가? 그것은 죽음의 소리에 멀어버린 귓가에서 파리가 먹이를 찾는 신호인가? 아니면 벗겨진 머리의 피투성이 머리칼을 잡아뜯는 풍뎅이인가? 아니면 아마도 죄어진 그 목을 장식하려고 길다란 머슬린을 짜는 몇 마리의 거미인가? 그것은 지평선 너머 마을의 벽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붉은 석양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목 매달린 시체…
살벌하지요. ‘교수대’는 해 질 녘 교수대와 교수대에 매달린 죽은 이의 모습을 묘사한 시입니다. ‘밤의 가스파르’의 3개 곡 중 가장 음산한 느낌의 곡입니다. 반복되는 동일한 음 ‘종소리’는 곡 전반에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곡 연주의 포인트 중 하나는 긴장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그런 부분을 살리는 능력이 또 굉장히 뛰어납니다. 예전에 한 지인이 “어느 연주자가 연주를 잘 하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길래, 음 하나하나를 잘 연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음과 다음 음 사이의 느낌을 어떻게 살리는지를 들어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음악이 매력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그런 간극까지 연주하기 때문인데요. 현장에서 들으면 몰입감과 긴장감이 엄청납니다. 특히 ‘교수대’ 연주에서는 그 음과 음 사이의 느낌과 함께 곡 전반에서 느껴지는 싸한 분위기를 소름 끼치게 표현했습니다.
스카르보
오! 몇 번이나 나는 스카르보를 보고 들었던가. 황금빛 꿀벌로 얼룩진 남색 깃발 위에 은화같이 달이 밝은 한밤중에! 몇 번이나 나는 들었던가, 내 침대를 둘러싼 실크 커튼 속에서 긁어대는 듯 울려 퍼지는 그의 웃음소리를. 몇 번이나 나는 보았던가, 천정에서 떨어져서 손을 놓은 마녀의 빗자루처럼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것을. 그리고 그가 사라지는가 하고 생각하자마자, 그는 대성당의 첨탑처럼 커지고 또 커져서 달빛을 가리고 그의 뾰족한 모자에서는 금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의 몸은 푸르게 변하여 마치 촛농처럼 투명해졌다. 그의 얼굴은 꺼져가는 양초처럼 창백해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라벨이 작정하고 어렵게 쓴 그 곡 ‘스카르보’는 ‘밤의 가스파르‘의 3개 곡 중 가장 유명합니다. 온디네가 물의 요정이라면 스카르보는 난쟁이 악마 요정입니다. 온디네가 환상이라면 스카르보는 악몽이고요. 스카르보는 장난을 좋아합니다. “은화같이 달이 밝은 한밤중에” 불쑥 나타난 스카르보는 괴기스럽게 웃더니 춤을 추며 온갖 정신 사나운 장난질을 하고는 갑자기 사라져버립니다. 시에 묘사된 스카르보의 모습도 온디네처럼 라벨의 이 음악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스카르보’는 기교적인 면과 음악적인 표현 모두 최고난도의 곡입니다. 단순히 빨라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만들기 위한 손과 발과 몸의 쓰임새가 다양하고 까다로워요. 그러나 조성진은 지난해의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연주 때처럼, 이렇게 어려운 곡을 꼭 어렵지 않은 듯이 연주했습니다. 사실은 엄청 어려운 곡인데도요.
다른 곡도 다 그렇지만 진짜 ‘스카르보’ 만큼은, ‘스카르보’ 만큼은! 20대의 조성진의 연주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곡이라고 단언합니다. 곡 후반부 스카르보의 장난이 절정에 다다를 때의 그의 연주는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조성진은 온몸으로 ‘스카르보’를 연주하며 시시각각으로 급작스럽고 극단적으로 변하는 악상 표현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강하다가 약하게, 크다가 작게, 격정적이었다가 몽환적으로, 마치 모든 손가락이 분리된 듯 손가락 근육 하나하나를 자유자재로 써 “손가락이 날아다닌다”는 말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요. 그러면서도 이 빼곡한 음표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연주했고, 페달로 음악이 그려내는 이미지의 선명함을 조절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스카르보’는 소름 돋고 난해하며 기괴합니다. ‘왕자님’ ‘도련님’ ‘클래식계 아이돌’ 같은 수식어로만 조성진 피아니스트를 그리고 상상하고 싶어 하는 분들께는 슬픈(?) 소식인데, 조성진 피아니스트는 이런 곡을 정말 잘 연주합니다.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조성진의 모습과 전혀 다른 면을 보여주었던 곡이 지난해 투어에서는 시마노프스키의 ‘마스크’였고, 올해 투어에서는 ‘스카르보’였습니다. 조성진의 ‘마스크’ 연주를 보고 “미친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한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고 쓴 적이 있는데요. 올해에는 연주에 미친 것 같은 그런 압도적인 몰입감, 어둡고, 불안하며, 광기 어린 음악을 연주하면서 도대체 그 안에 왜 있는지 모르겠는 아름다움을 ‘스카르보’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성진의 스카르보는 그렇게 이 공간을 있는 대로 휩쓸고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베르트랑 시의 스카르보처럼 휙 하고는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라벨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이 곡 역시 유튜브에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영상은 없는데요.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연주 중에서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공연이 정말 명연주입니다. 어떤 곡인지 궁금한 분들은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영상으로 감상해 보세요.
▲ 라벨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백건우 연주)|Youtube
라벨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도 물론 명곡이고 조성진의 연주도 좋았는데, 이번 서울 앙코르 공연에서 만날 수는 없으니 짧게 소개합니다. 제목처럼 우아하지만 다소 감상적인 이 곡은 일반적으로 ‘왈츠’하면 떠오르는 기쁘고 화려한 춤곡과는 다릅니다. 이 곡으로 2부를 시작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1부와 다른 모습, 말 그대로 우아하게 시작하면서도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에서 느꼈던 특유의 싸한 느낌이 여전하거든요. 그리고 ‘밤의 가스파르’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 곡도 진짜 어려운 곡입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3곡의 연주가 좋았습니다.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연주했던 드뷔시의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 곡을 좋아한다면 한번 들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4곡과 5곡의 현란한 오른손 연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 드뷔시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 (조성진 연주)|Youtube
쇼팽 스케르초 3·4번
18일의 앙코르 공연 프로그램에는 라벨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가 없고, 쇼팽의 스케르초 1·2번이 추가됩니다. 지난 경기아트센터 공연에서는 1·2번 연주가 없었기 때문에 직접 들은 스케르초 3번과 4번 연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 쇼팽 스케르초 3번 (조성진 연주)|Youtube
▲ 쇼팽 스케르초 4번 (조성진 연주)|Youtube
그전에 쇼팽을 만날게요. 워낙 유명한 작곡가이니 간단히 소개하면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쇼팽은 이미 8살 때부터 신동으로 유명했습니다. 첫 작품 <론도>를 출판한 것도 14세 때였지요. 쇼팽은 피아노를 지독하게 사랑했습니다. 많은 작곡가들이 관악, 현악 작품들도 쓴데 반해 쇼팽은 평생 피아노곡만 썼어요. 피아노 작품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쇼팽의 가장 큰 업적은 피아노라는 악기로 구현할 수 있는 기교와 음악적 표현을 혁신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겁니다. 한편 그는 조국 폴란드에 대해서는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진 애국자이기도 했습니다.
세계적인 권위의 콩쿠르 중 하나인 쇼팽 국제 음악 콩쿠르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5년에 한 번 열리는데요. 쇼팽을 기리는 대회답게 모든 경연곡을 오직 쇼팽의 작품으로만 심사합니다. 여기에 동시대 세계 최고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모여 경합하다 보니 ‘올림픽’에 비유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런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연주자가 바로 조성진 피아니스트입니다.
조성진은 쇼팽 콩쿠르 우승 후 첫 데뷔 음반에서만 쇼팽의 작품을 녹음했고, 이후에는 드뷔시,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의 작품으로 음반을 냈는데요. 지난 8월 27일에 새로 발매한 <쇼팽>은 데뷔 때의 <쇼팽> 이후 5년 만에 쇼팽의 곡으로 낸 음반이었습니다. 최근 있었던 기자간담회에서 한 기자가 그 이유를 묻자 “쇼팽 콩쿠르 우승자는 모두가 탐내는 자리고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위험한 점은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각인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걸 원하지 않았다. 이때쯤이면 다시 쇼팽을 녹음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는데요.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올해 연주를 들으니, 그가 왜 ‘이때쯤이면 다시 쇼팽을 녹음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야나체크와 라벨의 곡 연주도 물론 훌륭했지만 역시 가장 거침이 없고 자유로워 보였을 때는 쇼팽의 곡을 연주할 때였습니다. 확신에 찬 음악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조성진의 쇼팽 연주를 기대하는 이유는 물론 그가 쇼팽 콩쿠르 우승자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조성진이 우리가 상상하고 바라는 쇼팽, 화려함 속에 섬세함이 있고 피아노 소리는 별처럼 빛나는 그런 쇼팽을 정말 잘 재현하기 때문일 텐데요.
이날 그의 쇼팽 스케르초로 그런 기대를 모두 충족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수차례 언급한, 조성진이 만들어 내는 아주 맑고, 아름답고, 청명하고, 영롱한 음색은 더 발전한 기술과 표현력, 그리고 쇼팽의 명곡과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했습니다. 수식어가 너무 많은 것 같긴 한데 실제로 소리가 그래요. 많은 구간에서 주로 선율을 노래하는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손 연주도 완벽했고, 쇼팽 곡의 묘미인 루바토(rubato)도 노련하게 사용해 곡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습니다. 앞의 프로그램에서 그렇게 힘을 많이 썼는데도 스케르초 4번의 마지막 스케일 하나, 화음 하나까지 혼신을 다한 최고의 쇼팽 연주였습니다.
앙코르!
쇼팽 야상곡 9-2, 에튀드 ‘혁명’
조성진은 쇼팽의 상반된 매력을 보여주는 두 곡으로 깔끔하게 공연을 마무리했습니다. 특유의 매력적인 연주 방식 중 하나인 사라지는 듯한 음 연주를 지난해 공연에서처럼 많이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요. 그걸 야상곡 연주로 조금 더 들려주었습니다. 에튀드 ‘혁명’에서는 쇼팽 곡의 화려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강하고 거침없이 질주했고요. 연주회의 끝까지 온 힘을 다해 연주하던 그가 마지막 앙코르 곡의 마지막 화음을 연주하던 순간은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 쇼팽 야상곡 9-2 (조성진 연주)|Youtube
▲ 쇼팽 에튀드 ‘혁명’ (조성진 연주)|Youtube
연주회 전후로 그날 공연 프로그램 곡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이날도 어김없이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쇼팽을 들으며 (멍 때리고) 공연장으로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환해져 창밖을 보니 버스는 한강대교를 건너고 있었고 눈앞에 이런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날이 좋아서였는지 듣고 있던 음악이 좋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반짝이는 한강이 그 순간 따라 괜히 더 눈부셨습니다. 한동안 한강의 풍경은 이 모습으로 기억되겠지요.
영화 <비긴 어게인>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는, 음악이 평범하고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만들기 때문이라고요. 삶이 언제나 즐거운 수는 없겠지요. 창문을 열 수 없는 좌석버스처럼 갑갑하기도 할 거고요. 그럼에도 음악으로 인해 더 반짝이는 그런 찰나의 순간들이 있기에 우리는 계속 힘내어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클래식 음악을 어려운 것이라 으레 짐작하고 쉽게 멀리합니다. 그렇지만 클래식 음악 역시 우리의 일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그런 수많은 음악의 한 장르일 뿐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데는 어떠한 자격도 조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리뷰를 통해 조금이라도 클래식 음악, 조성진 피아니스트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그저 한번 들어보세요. 짧게는 여러분의 하루를, 길게는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시간이 될 테니까요.
▲ 조성진 <쇼팽(Chopin,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4개의 스케르초)>|Youtube
■ 공연 프로그램
<1부>
야나체크 – 피아노 소나타 1.X.1905
라벨 – 밤의 가스파르
-INTERMISSION-
<2부>
쇼팽 – 스케르초 1번~4번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앙코르-네이버TV 생중계>
2021.9.18
오후 5시
네이버TV <크레디아> 채널
공연시간 100분피아노 조성진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앙코르>
2021.9.18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8세 이상 관람 가능
공연시간 100분피아노 조성진
올댓아트 송지인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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