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이 가을 시즌 정기공연 <지젤>을 올린다. <지젤>은 ‘낭만 발레(Romantic Ballet)’ 시대 최고의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을 ‘백색 발레(Ballet blanc)’ 대표작으로 만든 바로 그 장면, 푸른 달빛 아래 하얀 의상을 입은 ‘윌리‘들의 정교한 군무는 황홀함과 신비로움의 극치로, 마치 무용수들이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2막 중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파드되 역시 수많은 발레 애호가들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춤이다.
<지젤>은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 테오필 고티에의 대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고티에는 독일의 세계적인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독일, 겨울이야기> 속 ‘윌리’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지젤>을 썼다. 이후 아돌프 아당의 음악에 장 코랄리와 쥘 페로가 안무해 1841년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됐다.
2개의 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죽음을 뛰어넘는 희생을 그린다. 시골 마을에 살던 지젤이 신분을 숨긴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고 그의 배신을 깨닫는 1막은 다양한 극적 요소와 발레 마임을 통해 관객을 극 속으로 초대한다. 2막에서는 영혼 ‘윌리’가 된 지젤이 윌리들의 왕 미르타의 명령을 거부하고 알브레히트를 죽음으로부터 지켜낸다. <지젤>은 황홀한 군무와 드라마, 중력을 거부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관객의 오랜 사랑을 받아왔다.
작품의 주인공 지젤은 풋사랑에 웃음 짓는 소녀의 모습부터, 영혼이 되어서도 연인을 지키는 숭고한 사랑의 감정까지 폭넓은 내면 연기가 필요한 인물이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미쳐가는 지젤의 ‘매드신(Mad Scene)’도 빼놓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다. <돈키호테>의 ‘키트리‘, <잠자는 숲속의 미녀> ‘오로라‘, <심청>의 ‘심청‘ 등 다양한 작품에서 꾸준히 좋은 연기를 선보여온 수석무용수 홍향기가 2년 만에 다시 지젤로 분한다.
지젤의 연인, 알브레히트 역에는 수석무용수 이동탁이 캐스팅됐다. 2011년 입단과 동시에 주역을 꿰차며 빠른 시간 안에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이동탁은 이번 무대에서도 흡입력 있는 연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두 사람은 2019년 <지젤> 무대에서도 완벽한 파트너십을 선보이며 ‘믿고 보는‘ 커플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입단 동기이기도 한 두 사람은 올해 근속 10주년을 맞았다. ‘발레 유망주‘로 불리던 때부터 프로 무용수의 생활까지 동고동락한 15년의 시간만큼 그들의 춤도 확연히 깊고 넓어졌다. 이제 무대 위에서 오고 가는 눈빛과 손짓까지도 돌아보게 됐다는 홍향기와 이동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 크고 작은 소식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이동탁 코로나로 인해 미뤄졌던 공연들이 올해 재개되면서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많은 양을 소화하고 있어요. 공연이 많아 좋기도 하지만 몸을 많이 쓰게 되니 부상에 대한 염려가 있어요. 최대한 조심하고 컨디션을 잘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홍향기 올해 정말 공연을 많이 하고 있거든요. 저도 지금 부상이 있는데, 그래도 이 시국에 계속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죠. 열심히 지내고 있습니다.
두 분 모두 올해 근속 10년을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발레단에서도 특별히 기념해 주었다고요.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프로 생활을 시작할 때 어떤 목표가 있었나요.
이동탁 입단 전에는 “나도 주역 무용수가 되어서 저런 춤을 추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입단 후에는 동료들, 선후배들과 일하게 되면서 발레단에 필요한 무용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 같고요.
홍향기 사실 저는 입단할 때 목표가 없었어요. 당시 슬럼프가 겹치기도 해서 “수석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요. 한 번은 객석에서 발레단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단체로 춤을 추는 모습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코르 드 발레도 너무 멋있어서 저기라도 끼고 싶다고 생각했죠. 입단 후 일 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나도 언젠간 저 솔로를 해야 하는데” 생각하면서 수석무용수라는 목표가 생겼던 것 같아요.
두 분은 현재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인데, 수석무용수는 모든 무용수들이 꿈꾸는 자리잖아요. 큰 목표를 이루고 난 후에는 어떤 생각을 갖게 됐나요.
홍향기 솔리스트와 수석은 거의 비슷해요. 저도 솔리스트 당시에 주역 롤을 받았었고요. 바깥에서 나를 불러주는 명칭이 바뀐 것 말고는 딱히 변한 게 없었죠. 사실 수석무용수가 되었을 때, ‘나 너무 잘했다!’라는 마음보다는 공허한 게 컸어요. 고민이 많던 찰나에 좋은 조언을 들었죠.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또 다른 계획을 세우면 되지 않겠냐고요. 그 후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수석무용수는 등급보다는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는 위치예요. 제 자리에서 어떤 일들을 해나가야 할지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이동탁 남자 무용수는 솔리스트 역할을 받을 기회가 많아요. 저도 드미 솔리스트일 때부터 대역으로 솔로를 했고요. 그때는 부담감도 없고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고.(웃음) 실수를 해도 “처음이고, 아직 드미 솔리스트잖아“가 되죠. 수석무용수가 되고 나니까 제가 해왔던 게 결코 그렇게 가볍게 해서는 안 될 무대고 역할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처음엔 안 하던 실수도 하고, 무대를 견뎌야 한다는 책임감이 부담으로 다가오면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이쯤 했으니 유지만 하자’는 마음보다는 더 좋은 모습이 뭘지 계속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동료들, 후배들이 받쳐주고 있는데 제가 실수를 하면 안 되니까요. 항상 최대한 좋은 컨디션, 에너지를 가지고 무대에 서려고 해요.
유니버설발레단이 10월 말, 2년 만에 <지젤>을 올립니다. 두 무용수 모두 주역을 맡았는데요. 전체적으로는 무엇에 중점을 두어 연습하고 있나요.
홍향기 30대가 되니 연륜이 쌓여 굳이 기술적인 시도를 하지 않아도 흘러가는 대로 동작이 만들어지더라고요. 연기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정말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고 있어요.
이동탁 그렇게 하다 보면 감정이 더 극대화되어서 다가와요. 고개를 들어도 고개와 눈을 동시에 들어 마주칠 때와, 고개를 먼저 들고 서서히 눈을 들어서 마주칠 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연기를) 받아주는 입장에서는 감정이 더 확 다가오거든요. 차이가 굉장히 크고, 그런 부분에서 공연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 같아요. 전막을 관람할 때 전체적으로 흐름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그런 부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습을 보면 어색했던 지점이 보이거든요. 예를 들면 제가 향기 씨가 내미는 손을 잡는 부분이 있는데요. 파트너의 오른손을 잡을지, 왼손을 잡을지 그런 부분도 상의해요. 매끄럽고 유연한 파트너십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향기–동탁 페어는 관객들이 ‘믿고 보는’ 조합입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도 ‘가장 편한 파트너’라고 이야기해왔는데요. 이번 <지젤> 공연에서의 호흡은 어떤가요.
이동탁 보통은 파트너십에 대한 부담 때문에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맞추는데, 향기 씨와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부담이 되는 부분이 전혀 없어요.
홍향기 호흡은 뭐…말할 것도 없죠.(웃음) 제가 몸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 더 많이 (파트너에게) 맡기고 있어요. 같이 하는 동작에서 어떻게 받아야 제가 아프지 않을지, 혼자 저를 위해 연구를 많이 해주고 있어요.
이동탁 편하기 때문에 그만큼 다른 쪽을 많이 신경 쓸 수 있고, 자연스럽게 개인 기량이 좋아져요. 춤도 더 재미있어지고요. 공연을 많이 보신 관객들 중 “어? 좀 늘었네?”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분명히 있으실 것 같아요.
홍향기 무용수가 맡은 ‘지젤‘은 순박한 여성이었다가 죽은 후에 ‘윌리’가 되는, 복잡한 캐릭터인데요.
홍향기 사실 지젤이라는 캐릭터는 저와 성격이 정반대예요. 저는 순박한 스타일은 아닌데.(웃음) 그래서 1막이 더 재미있어요. 지젤은 상대를 너무 사랑해서 미쳐버리는 사람인데,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오히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 연기에 스스로 빠지지 않고, 연기로 관객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죠. 2막에서 지젤은 귀신처럼 보여야 하는데요. 표정이나 연기가 아닌 동작으로만 표현해야 해요. 걸어가는 것도 영혼처럼 보이기 위해 정말 가볍게 걸어야 하고요. 어려운 일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이동탁 무용수가 맡은 ‘알브레히트‘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캐릭터인 것 같아요.
이동탁 알브레히트는 요즘 말로 하면 ‘금수저‘예요. 지젤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가서 “나도 너희와 같은 시골 청년이야” 하고 속이는 거죠. 지젤을 꼬드겨 놓고 들통이 나니 회피하는 나쁜 남자고요. 알브레히트가 시간이 흘러 지젤의 무덤에 찾아가는데, 저는 지젤을 사랑해서 찾아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말 사랑했다면, 시종에게 불을 비추라고 시키면서 오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나 때문에 이 여자가 죽었구나’하는 죄책감과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온 거죠. 지젤이 다시 한번 알브레히트의 목숨을 구해주고 나서야 정말 사랑이었다는 걸 깨닫는 인물로 해석했어요.
알브레히트는 막이 내린 후가 궁금해지는 인물이기도 해요. 알브레히트는 <지젤>의 사건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이동탁 알브레히트는 ‘지젤‘을 만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깨달음을 얻어요. 마지막 장면의 감정은 슬픔이 전부가 아니라 깨달음과 뉘우침의 태도가 다 들어있죠. 그 순간 이후로 인생이 아주 많이 바뀌지 않을까요. 잘못을 뉘우치고 착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각자의 캐릭터를 잘 표현하기 위해 어떤 부분을 가장 신경 썼나요.
홍향기 표정에 중점을 두고 연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술도 완벽하게 소화해야 하지만, 드라마가 많은 작품들은 연기를 하다 보면 기술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 같아요.
이동탁 알브레히트는 귀족이라 기본적으로 몸에서 나오는 태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숨기고 ‘시골 청년‘을 연기하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습관적으로 그동안 해왔던 제스처나 뉘앙스가 나오죠. 지젤이 안 볼 때 옷매무새를 정리한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힐라리온과 다투는 장면에서도 그렇고, 여러 장면에 그런 디테일을 넣었어요. 발레 공연에서는 말을 할 수 없으니 그런 작은 부분들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몸으로 보여드리고 싶어요.
두 분이 <지젤>에서 가장 좋아하는, 혹은 내가 맡은 캐릭터에 가장 감정이입이 되는 장면이 있나요.
홍향기 제가 좋아하는 장면은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처음 만나는 장면과 마지막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헤어지는 장면이에요. 첫 장면은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을 시작할 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 좋고, 마지막 장면은 상대를 용서하고 무덤으로 다시 돌아갈 만큼 큰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 좋아요. 음악도 정말 아름답고요.
이동탁 2막에서 알브레히트가 지젤의 무덤가에 찾아왔을 때부터 지젤과 파드되 하기 전까지의 장면을 제일 좋아해요. 의문을 가지고 무덤을 찾았던 알브레히트가 서서히 지젤의 진심을 알아가는 과정이 다 보이거든요. 이제 그 뒤에 나오는 힘든 과정은 벌을 받는 거예요.(웃음)
32번 앙트르샤 씨스가 나오는 장면인가요.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겠어요.
이동탁 그 장면도 그렇지만, 배경이 현실 세계가 아니거든요. 슬퍼하면서 춤을 춰야 하는데 현실적인 움직임을 할 수가 없어요. 다리는 정말 힘든데 상체는 힘을 풀고 ‘슬로 모션’으로 춰야 해서, 팔을 안 쓰고 달리기를 하는 느낌이에요.
<지젤>은 낭만 발레 시대뿐만 아니라 클래식 발레 전체의 대표작 중 하나에요.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동탁 <잠자는 숲속의 미녀>나 <백조의 호수>는 현실을 벗어나 있는 사랑 이야기인데, <지젤>은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는 ‘사랑과 전쟁‘ 이야기예요. 관객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고,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게 매력인 것 같아요.
홍향기 <지젤>은 작품을 보고 난 후에 팬이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보통 ‘발레리나’라고 하면 <백조의 호수>처럼 튀튀를 입은 모습을 연상하는데, <지젤>은 선을 다 가리는 치마를 입는데도 불구하고 조금 보이는 실루엣에서 ‘가녀림’이 나오잖아요. 그런 무용수들이 하나가 되어서 ‘윌리‘의 움직임을 하는 것이 굉장히 극적으로 다가가는 것 같아요. 또 지젤이 아파서 쓰러지고, 정신을 놓고, 그런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새롭게 느끼시기도 하더라고요.
직접 춤을 추는 무용수의 입장으로는 <지젤>에서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있었나요.
이동탁 <지젤>은 끝난 후의 여운이 정말 많이 남는 작품이에요. 내 마음대로 다 잘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가, 상대의 죽음을 겪었다가, 또 마지막에는 큰 깨달음을 얻고…. 감정선의 폭이 굉장히 넓어서 저로서는 두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거든요. 작품이 끝나면 체력적으로 피곤한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피로해져요.
홍향기 20대 때 조금 더 연륜이 쌓이면 가장 해보고 싶은 작품 중에 하나였어요. 유일하게 클래식 발레에서 머리를 푸는 작품이기도 하고, 언제 무대에서 한번 미쳐보겠어요. 미치는 장면에서도 예술적인 면이 보이고, 그걸 또 내가 추고… 그래서 할 때마다 참 좋아요.
이번에 공연하는 <지젤>뿐만 아니라, 10년 동안 유니버설발레단의 거의 모든 레퍼토리를 경험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이나 공연이 있다면요.
홍향기 단연 <춘향>이에요. 당시에도 오빠와 파트너였는데, 정말 많이 울면서 연습했어요. 제가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닌데 한 번씩 터질 때가 있거든요. 보통 한 번 울고 바로 괜찮아지는 스타일인데, <춘향>은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춘향>은 유병헌 감독님의 작품이고 창작 발레라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클래식과는 다른 동작들이 많았어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자괴감이 오더라고요. 내가 몇십 년 동안 발레를 했는데, 이런 것 하나 못하는 사람인가. 공연을 올렸는데 성취감이 엄청난 거예요. 무용수들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받는데, 그 어느 박수보다 값진 박수였던 것 같아요.
이동탁 저도 힘들어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는데, <오네긴> 초연이에요. 너무 힘들어서 계속 포기하려고 했어요. 연습도 힘들고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겹쳤죠. 잠을 한숨도 못 자고 첫 번째 공연을 끝내고, 두 번째 공연을 마치니까 긴장이 풀리는 거예요. 당시 지도해 주시던 선생님을 껴안고 펑펑 울었죠. 그렇게까지 애를 썼던 적이 처음이라 눈물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는 공연도 있는데요. 제가 사고를 많이 치는 스타일이거든요. 발레단 레퍼토리 중 전막으로 하는 현대무용 작품을 하는데, 너무 잘하고 싶어서 공연 중간에 탈의실에서 혼자 연습을 열심히 했어요. 팔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고 있는데 제가 나가야 하는 부분 음악이 나오는 거예요. 전력질주해서 무대에 나가는데, 뭔가 띵하더라고요. 춤을 추는데 땀이 뚝뚝 나서 보니, 찢어져서 피가 나는 거였어요. 다행히 대역을 맡았던 친구가 있어 응급실로 갈 수 있었죠.
10대 ‘유망주’의 시기를 지나 20대 왕성한 활동을 거쳐 노련함이 돋보이는 30대의 무용수가 되었어요. 발레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10대 때와 지금의 나의 발레는 어떻게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하나요.
이동탁 어릴 때의 발레는 ‘분노‘였어요. 잘 하고 싶은데 안 되니까 화가 났어요. 5년 내내 국제 콩쿠르 1차에서 탈락했는데, 저는 1차에서 탈락하고 다른 친구들을 3주 동안 기다리는 상황이 계속되니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났던 거죠. 학생 시절을 보내고 20대 때도 의욕이 앞섰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잔부상도 많았고요. 이제는 발레가 저에게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걱정거리가 있어도 발레를 하면 잡생각이 들지 않아요. 건강에도 도움을 많이 주고요. 예전에는 발레를 하지 않는 친구들과 저를 비교도 하고, 부정적인 마음도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감사해요.
홍향기 10대 때는 제 자신만 생각했어요. 학생 때는 보통 콩쿠르를 위해 솔로를 많이 하고, 다 같이 추는 기회가 적으니까요. 입단 후 공연을 만드는 과정이 단체 생활로 이뤄진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또 어렸을 때에는 무조건 예쁘고 기술적으로 잘하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30대에 그것만이 좋은 무용수의 조건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죠.
오랜 시간 발레를 한 두 분의 최근 고민은 뭔가요.
홍향기 저는 항상 건강한 무용수였는데, 요즘은 몸이 안 좋을 때가 조금씩 있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관리를 잘 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합니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 10년 동안 일하며 발레단의 수많은 작품들을 했죠. 새로운 레퍼토리를 많이 만나보고 싶다는 갈증도 있어요.
이동탁 요즈음 제가 췄던 춤들을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어요. 발레를 처음 배울 때 두 손으로 바를 잡고 무릎을 구부리는 것부터 배워요. 거기로 다시 돌아가서, 어떻게 무릎을 잘 구부릴 수 있는지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제 움직임의 기본을 다시 고민하는 거죠.
끊임없이 발레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홍향기 슬프다가도 발레가 잘되면 기분이 좋아져요. 발레로 인해서 제 감정이 움직이고, 건강을 챙기고, 일상에 원동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제 일상이 발레인 거죠.
이동탁 저도 같은데요. 예전에는 지금까지 해온 게 있으니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어요. 공연 날 제게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무대에서 그런 에너지를 풍기면 모든 동료들이 영향을 받아요. 공연을 위해 컨디션 조절을 하는데, 처음에는 노력으로 만들어낸 가짜 에너지였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말하다 보니 나이 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웃음)
나에게 ‘발레‘란?
홍향기 남자친구 같은 존재예요. 너무 좋고, 사랑하지만 원치 않는 밀당을 해야 하잖아요. 발레도 그래요. 매일 잘 되던 게 하루아침에 안 될 때도 있죠. 그래도 계속 함께 하는, 애증의 관계인 것 같아요.
이동탁 ‘고마움‘이에요. 저를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준 게 발레거든요.
<지젤>을 보러 오시는 관객들께 한 마디 남긴다면.
홍향기&이동탁 오랜 시간 함께 한 ‘향기탁’ 커플이 무대에 오릅니다. 이번 공연도 더 새롭고 흥미롭게 준비했으니, 예쁘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2021. 10. 29~31
평일 오후 7시 30분
주말 오후 2시, 6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유니버설발레단
올댓아트 변혜령 인턴
송지인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유니버설발레단, 사진 올댓아트 김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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