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는 흔히 백조에 비유되곤 한다. 우아한 실루엣 뒤 숨어있는 혹독한 훈련과 자기관리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에서 발레리나의 상처투성이 발과 비 오듯 땀 흘리며 연습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무용수가 힘들고 고된 건 몸의 고됨 때문만은 아니다. 무용과 오랜 시간 동행하는 내내 그를 대하는 ‘순수함‘을 간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팔과 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노력을 요한다.
보통 대여섯 살에 발레를 시작하는 것을 감안했을 때, 발레리나는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발레와 함께다. 발레리나 권세현은 발레를 자신의 ‘단짝 친구‘라고 불렀다. 20여 년을 함께 해 익숙한 만큼 가끔은 소홀하게 대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인터뷰 내내 “끊임없이 순수하고 진실되게 춤추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예술이 주는 기쁨 외에도 좌절과 고통을 모두 경험한 후에 세운 목표가 “어떤 위치에 도달하고 싶다“거나 “잘 하고 싶다“가 아닌 “평생 순수하고 싶다“는 이야기라 와닿았다.
5살에 발레를 시작한 권세현은 워싱턴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수학했다. 다양한 컨템퍼러리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북유럽의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 노르웨이 국립 발레단, 폴란드 국립 발레단을 거쳐 2019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다. 입단 후 첫 공연 <지젤>에서 ‘미르타‘를 맡아 무대 위 존재감을 과시했다. <백조의 호수>,<발레 춘향>,<심청>,<호두까기 인형>과 같은 클래식 작품은 물론, <오네긴>과 같은 드라마 발레를 모두 섭렵하며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다가오는 6월, 유니버설발레단의 올해 첫 정기공연 <돈키호테>를 준비하고 있는 권세현을 만나 그간의 활동과 근황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코로나로 발레단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많이 있었을 것 같아요. 어떻게 지냈나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위험해서 연습이 많이 없었어요. 다행히 지금은 공연도 다시 시작되었고, 연습 시간도 늘어났어요. 리허설이 어려웠던 기간에는 개인적으로 훈련을 많이 했어요. 선생님 없이 혼자 연습하는 시간에 부족한 것을 찾을 수 있거든요. 시간을 오래 두고 연습하는 동안 단점도 발견했지만 ‘아, 앞으로 나의 이런 점을 어필하면 좋겠다‘하는 부분도 있었고요. 요즘 심리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관련 영상을 보면서 공부하기도 했어요.
심리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생긴 건가요?
사는 게 모두 관계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까, 문득 제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잘 이어나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간 권세현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겠네요.
맞아요. 어렸을 때부터 발레를 해서 발레를 제외한 저를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알게 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스스로를 따듯하게 대하게 돼요.
발레는 언제부터 접했나요?
5살 때 처음 시작했어요. 어머니가 발레를 전공하시고 발레 학원을 하셔서 쉽게 접했죠. 어머니는 처음에 발레는 힘든 길이라고 못하게 하셨어요. 꿋꿋이 학원에 계속 가니까 7살 때 “그럼 하고 싶은 거 해” 하시면서(웃음) 허락하셨어요.
내가 가는 길을 부모님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때론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되게 차분하신 분이세요. 어렸을 때 욕심이 많았던 저를 많이 눌러주셨어요. “지금 욕심부리면 나중엔 질려서 못 한다“라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고요. 지금도 말을 많이 아끼세요.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참고 참다가 조용히 와서 말씀하세요. 항상 응원해 주시는 분이에요.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을 시작으로 노르웨이, 폴란드까지 다양한 해외 발레단에서 활동했죠. 해외 진출을 결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생 때 유튜브로 발레 영상을 찾아보는 걸 좋아했어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해외 발레단 레퍼토리까지 다 봤는데, 나중엔 무용수 이름이나 캐스팅까지 외웠어요.(웃음) 자연스레 ‘보는 것 말고 나가서 실제로 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겼어요. 생각보다 시험 보러 다니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다 했거든요.
컨템퍼러리 레퍼토리가 주요작인 발레단에서 많이 활동했는데요. 세계적인 안무가들과도 많이 작업하셨고요. 잊지 못할 작품이 있나요.
지리 킬리안의 <Bella Figura>가 성장의 기반이 되어준 작품이에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을 손끝, 발끝, 모든 동작 안에 표현한 작품인데요. 지리 킬리안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아주 자세하고 많은 정보를 줘요. 몇 시간씩 설명을 듣고 작업을 하면서, “(배경이 달라도) 경험하는 것은 비슷하구나, 그런 아픔을 나만 겪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겪는구나“라고 느꼈어요. 공감이 되니까 대화가 되고, (공감을 통해) 춤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경험하면서 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요.
지리 킬리안이나 존 뉴마이어 같은 안무가들은 공통적으로 “예술을 진실하게 대하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했어요. 리허설 도중에 제가 잠깐 딴생각을 하면 바로 말씀하셨어요. “너답게, 진실하게 해야 예술이지, 순간 하기 싫다거나 (다른 이유로)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보는 사람도 안다. 지금 내가 안다“라고요. 그런데 그 말을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학생 때도 느낌을 신경 쓰긴 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형태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안무가들이 요구하는 동작은 제가 그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절대 나오지 않는 동작인 거예요. 만들어낸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동작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요. 사실 춤은 감정, 표현, 경험을 표출하는 거고, 그게 본질인데… 그걸 느낀 순간 ‘아, 이게 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국을 포함한 5개국을 오가며 무대에 서 왔는데요. 급격히 바뀌는 환경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나요?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스며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동시에 ‘제 자신을 절대 잃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었어요. (유럽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박물관도 가보고 혼자 거리에 앉아 세 네 시간씩 사람들을 지켜보기도 했어요. 동료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질문도 계속하고요. 하지만 저는 한국인이잖아요. 내가 가진 한국의 문화를 간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해외 진출을 원하는 무용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해외 진출을 추천하나요
다양한 레퍼토리와 넓은 세상을 접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어요. 저는 제 경험을 후회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본인이 정말 원해야 할 것 같아요. 해외 생활을 혼자서 책임지는 건 쉽지 않아요. 정말 원해야 적응할 수 있고 버텨낼 수 있어요. 긴가민가 하고 있다면 섣불리 가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귀국 후 2019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습니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너무 많은데, <지젤> 리허설할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하고 첫 공연이었기 때문에 너무 설렜고, ‘나도 여기에 함께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 기뻤어요. 좋은 선생님들과 감독님, 단원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요. 또 영어로만 얘기하고 살다가 한국말로 제대로 리허설을 한다는 게 감동이었어요.(웃음)
6월 <돈키호테>공연을 앞두고 있는데요. 어떤 배역을 맡았나요? 어떤 점을 신경 써서 연습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1막 투우 장면에서 6명의 여자 무용수 중 한 명이에요. 2막과 3막에서는 드리아드와 키트리 친구 역할을 맡았습니다. <돈키호테>는 굉장히 정열적이고, 매력적이고, 한 여름의 스페인 같은 작품이에요. 캐릭터들도 아주 강하고요. 캐릭터는 유지하면서 저만의 느낌을 넣으려고 했어요.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무용수에게는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든 작품일 것 같아요.
맞아요.(웃음) 그런데 <돈키호테>가 가진 에너지는 뿜어 나오는 에너지잖아요. 밝고 흥나고 즐거워요. <돈키호테>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음악도 기분을 쭉쭉 올려주는 음악이고요. 연습하다 보면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요. 즐겁게 연습하고 있습니다.
올댓아트 독자들에게 유니버설발레단의 레퍼토리를 하나 소개한다면요.
단연 <심청>과 <춘향>이에요. 클래식 작품을 안무하는 게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심청>과 <춘향>은 음악과 동작이 잘 어우러져서 정말 아름다워요. 작품의 흐름도 좋고요. 한국의 문화가 돋보인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춤을 추면서도 제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동작이 제 몸에 잘 맞는 느낌이에요. 공연할 때 한국적인 음악에 한복을 입고, 한국적인 동작을 하는데 행복하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랜 시간 발레를 전공하면서 슬럼프가 왔을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
폴란드 국립 발레단에 있을 때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외로움이 몸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오히려 “그래, 한 번 지독하게 외로워보자. 그러면 나를 더 초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지냈어요. 평일엔 열심히 연습하고 주말에는 혼자 여행도 다녔고요. 바다에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다 온 적도 있어요. 발레 외의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되면서 깊어지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를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무용수로 사는 건 쉽지 않죠. 정말 원해야만 할 수 있고요. 저는 손끝, 발끝, 머리, 등, 어깨… 몸으로 표현하는 게 너무 좋아요. 좋아서 음악만 들어도 움직이고 싶어져요.
발레리나 권세현의 최종 목표는 뭔가요?
항상 같은데요. 순수한 영혼으로 진실되게 예술을 대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관객들이 느꼈으면 좋겠어요. 아주 나중에는 교육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제가 경험한 것들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나에게 ‘발레‘란?
저와 함께 평생 같이 하는 단짝 친구. 저를 가장 저답게,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유니버설발레단 <돈키호테>
2021.6.4. ~ 6.6.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8세 이상 관람 가능
공연시간 150분유니버설발레단
올댓아트 변혜령 인턴
송지인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사진·자료 | 유니버설발레단, 올댓아트 변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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