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유니버설발레단이 정기공연 <돈키호테>를 선보였다. 팬데믹 이후 1년 만에 재개된 반가운 공연에 극장은 관객과 무용수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화려한 춤, 신나는 음악, 이국적인 배경…희극발레 <돈키호테>를 돋보이게 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발레 마임이다. 주인공 키트리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을 귀족, ‘가마슈‘역의 루이스 가드너의 유쾌한 마임과 연기에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루이스 가드너는 영국 로얄발레학교를 졸업한 후 싱가포르 발레 시어터를 거쳐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다. <돈키호테>의 ‘가마슈‘와 같은 익살맞은 캐릭터뿐 아니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지젤>, <호두까기 인형>같은 클래식 발레,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 존 크랑코의 <오네긴> 등 드라마 발레, 모던발레 <마이너스 7>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해내고 있다.
연이은 공연 취소와 기약 없는 팬데믹 사태에도 다시 무대에 돌아올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는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하는 루이스 가드너와의 일문일답.
무용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떻게 발레를 접하게 되었나.
나는 아주 에너지가 많은 아이였다. 부모님은 내가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다양한 경험을 추천해주셨다. 여러 스포츠를 많이 접했지만 즐겁지 않았다. 11살 즈음 발레를 시작하게 됐고, 접하자마자 모든 과정을 즐길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발레를 전공하게 되어, 엘름허스트 발레 학교를 거쳐 로얄발레학교에서 수학했다.
영국 로열발레학교를 졸업 후 싱가포르 발레단에서 프로 무용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커리어의 시작을 아시아에서 하게 된 이유가 있나.
학교에서의 마지막 해에 일본으로 투어를 가게 됐다. 한 달간의 경험은 최고의 시간이었고, 아시아와 내가 잘 맞는다고 느꼈다. 이후 싱가포르 댄스 씨어터의 예술감독이 클래스를 참관하러 학교에 방문했다. 감독에게 입단의 의지를 밝히고, 후에 이메일로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젊고 그 어떤 구속도 없었으니, 아시아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해보니 어떻던가.
싱가포르는 동양뿐 아니라 서양의 생활방식이 모두 어우러져 있는 나라다. 적응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싱가포르에서 내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처음부터 동아시아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꽤 힘들었을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생활하며 동양 문화권에 익숙해지고 더 많이 알게 되다 보니, 한국에서 와서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이후 2016년부터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싱가포르에서의 생활 끝 무렵에 발레단과 잘 맞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변화가 필요했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오디션을 볼 생각이었다. 유럽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족들과 좀 더 가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페이스북을 훑어보던 중에 유니버설발레단의 스폰서 링크를 발견했다. 그때 본 영상은 <라바야데르>의 쉐이즈 리허설 장면이었다. 몇 분 안 되는 영상이었지만 환상적인 군무라는 생각이 들었고 관심이 생겼다. 당시 발레단의 수석무용수가 마침 한국인이라 유니버설발레단에 관해 물어보니, 좋은 발레단이니 도전해보면 좋겠다고 추천해주었다. 이후 오디션을 통해 입단하게 됐다.
발레단마다, 나라마다 고유한 스타일이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스타일은 어떤가.
전세계적으로 모든 발레단이 통일성 있는 군무를 선호하긴 하지만, 유니버설발레단의 군무는 정말 인상적이다. 처음 유니버설발레단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 동영상도 <라바야데르>의 군무 영상이었으니까. 사실 그렇게 군무를 맞추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백조의 호수>의 유명한 ‘네 마리 백조의 춤‘ 같은 경우도 무용수 한 명의 동작이 다르면 굉장히 눈에 띄는 경향이 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신경 쓰다 보니 관객들이 작품을 편하게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또 유니버설발레단에 와서 느꼈던 것은 <호두까기 인형>을 정말 많이 공연한다는 거다.(웃음)
타지에서의 생활은 크고 작은 어려움이 많다. 한국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던 점이 있나.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언어였다. 아주 새로운 언어를 배우다 보니 처음에는 문제가 생겨도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매한 물건에 하자가 있는데도 환불을 못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생활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언어가 늘었다.
벌써 6년째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발레단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가장 특별하고 기억에 남는 것은 2019년 파리 공연이다.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이었는데, 가족들이 아주 오랜만에 내 공연을 보러 왔다. 부모님은 이전에 종종 공연을 보러 오시곤 했지만, 한국에 방문하실 때마다 일정이 맞지 않아 공연을 보지 못했었다. 유니버설발레단 입단 후 처음 보시는 공연이었다. 형이 마지막으로 본 내 공연은 어릴 때 했던 공연이었다. 프로 발레리노가 된 이후 처음 보는 공연이라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모던 발레 <Imperfectly Perfect>도 기억에 남는 작업이다. 처음엔 현대적인 움직임을 해낼 수 있을까 두렵고 걱정이 됐지만, 내 두려움을 정복하고 (공연을) 잘해낼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무용수로서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5년 넘게 같이 활동하다 보니 이제 단원들은 가족 같은 느낌이다. 연습실에서 보내는 일상들도 나에게는 행복한 순간으로 남아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로미오와 줄리엣>, <오네긴>, <백조의 호수>, <지젤>, <돈키호테>, <호두까기인형>, <심청>, <발레춘향> 등 유니버설발레단의 대표레퍼토리들을 모두 경험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오네긴>같은 드라마 발레를 좋아한다. 기술적이고 캐릭터들이 살아있는 <돈키호테>도 선호한다. 지난 <돈키호테> 공연에서 맡았던 ‘가마슈‘도 해석과 표현의 여지가 많은 캐릭터라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유니버설발레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심청>과 <춘향>이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만 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음악과 춤이 매우 아름답다. <심청>을 처음 공연하던 날, 무대에서 음악이 시작되는데 “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동시에 굉장히 힘든 작품이다. 힘든 만큼 성취감도 크고. <심청> 30주년 기념 공연도 생각나는데, 공연의 시작과 끝을 역대 ‘심청‘역의 무용수들이 장식했다.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심청>과 <춘향>은 한국적인 정서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작품에 이입이 어렵지는 않았나.
기술적인 부분은 문제가 없었다. 작품의 시작이 마을 장면인데, 즉흥 연기 위주로 진행되는 장면이었다. 무대에서 한국의 ‘아저씨‘처럼 보여야 했다. 내가 익숙한 발레 연기와는 아주 달라 처음엔 어떻게 할 줄 몰랐고, 다른 무용수들을 보면서 그들을 따라 하곤 했다. 얼마나 어색했는지…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웃음)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주위의 ‘한국 아저씨‘들의 모습을 관찰하거나 비디오를 보면서 점점 표현이 자연스러워졌다.
지난 6월, 약 1년 만에 열린 정기공연 <돈키호테>에서 귀족 가마슈 역을 맡았다. 유머러스한 캐릭터 표현이 돋보였다는 평이 많다. 오랜만에 무대에 선 소감이 궁금하다.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가마슈 같은 역할은 사실 연습실에서 완벽하게 연습하기가 어렵다. 익살맞은 캐릭터를 연기하다 보면 자신을 의식할 때도 있고, 종종 작품에 완벽히 몰입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무대 세트, 의상, 관객이 있는 무대에 오르면 캐릭터에 확실히 집중하게 된다. 연습실에서는 마임과 동작을 모두 연습할 수 있지만, 무대에 섰을 때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는 것을 느낀다.
연습 이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
요리와 제빵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구운 케이크나 빵, 쿠키를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테마가 있는 디너 파티를 열기도 한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도 하고. 반려견과 산책하면서 다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외국인이다 보니 눈에 잘 띄어 집 주변에서는 이미 유명인사가 됐다. 친구들에게 종종 “내 친구가 널 봤다더라. 금발머리에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웃음)
무용수 생활 중 슬럼프가 온 적이 있나. 어떻게 극복하고 대처했나.
2020년은 모두에게 슬럼프였을 것이다. 공연은 물론이고 연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계속 공연이 취소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무용수의 목표는 무대에 서는 것인데, 무대에 설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되는 것이 힘들었다. 올해 초까지도 공연을 연습하면서 무대에 올라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연습하는 것이 전처럼 행복하지 않았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무대에 다시 선 순간, 이전의 감정과 무대가 주는 에너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무용수뿐 아니라 모든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이 슬럼프를 겪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현재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계속해나가는 것뿐이다.
루이스 가드너에게 ‘발레‘란?
발레와 오랫동안 함께했으니 발레가 내 인생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발레가 나의 전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발레를 하면 항상 평가받아야 하고, 자신을 엄격하게 바라보면서 부족한 점을 찾아 나가야 한다. 건강하게 커리어를 이어나가기 위해, 때로는 그런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발레는 정말 내 인생을 많이 바꿔 놓았다. 어렸을 때 나는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였지만, 그 에너지를 어떻게 내보내야 하는지 몰랐다. 발레는 내게 에너지와 분노의 배출구이자 소통창구가 되어 주었다. 가끔 발레를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느끼하지만, ‘발레가 나를 살렸다‘고 표현하고 싶다.(웃음)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2021. 10. 29~31
평일 오후 7시 30분
주말 오후 2시, 6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유니버설발레단
올댓아트 변혜령 인턴
송지인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유니버설발레단, 올댓아트 변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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