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842년 6월의 저녁, 파리 오페라 극장의 막이 내리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날 새로 선보인 발레 작품에는 평단과 관객의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주역을 맡았던 발레리나는 파리의 인기 스타가 되었죠. 낭만발레의 정수라고 불리는 <지젤> 이야기입니다.
<지젤>이 만들어진 19세기는 사회 전반에 낭만주의의 바람이 불던 때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산업 혁명 등 굵직한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며 삶이 힘들어지자, 사람들은 각박한 현실 대신 화려한 환상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극장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무용수들의 움직임,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드라마틱한 줄거리, 서정적인 음악…당시 관객이 열광할만한 요소를 모두 갖춘 <지젤>의 흥행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 시기에 발레는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 극장에서 공연되면서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큰 변화가 있었는데요. 오늘 우리가 떠올리는 발레의 이미지가 이때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내에는 오는 10월, 유니버설발레단이 2년 만에 <지젤>을 선보입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은 1985년 발레단 초연 이후, 1999년 스페인, 이탈리아, 헝가리에 이어 그리스, 독일, 스위스, 영국, 오스트리아 등 투어를 통해 한국 발레단이 유럽 무대에 처음 진출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죠. 올해 공연도 최단 시간 안에 매진 사례를 일으키며 인기를 입증했습니다. 오늘은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관객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지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젤>의 줄거리
독일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지젤>은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사랑과 배신, 죽음을 2막에 걸쳐 다루고 있습니다.
1막
포도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는 시골 마을, 마을에 살고 있는 지젤은 신분을 숨긴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집니다. 지젤을 오래 흠모해온 사냥꾼 힐라리온만이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의심하죠. 포도 수확을 마치고 흥겹게 춤을 추던 지젤 앞에 알브레히트의 약혼녀 바틸드가 모습을 드러내고, 지젤은 알브레히트의 정체와 배신을 깨닫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지젤은 정신을 놓아버리고, 비통함 속에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2막
밤의 숲속에는 지나가던 남자들이 지쳐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만드는 ‘윌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지젤의 무덤가를 찾아온 힐라리온은 윌리들의 저주에 걸려 끊임없이 춤을 추다 죽음을 맞게 되죠. 무덤을 찾은 알브레히트는 윌리가 된 지젤을 만나고, 지젤은 알브레히트가 죽을 때까지 함께 춤추라는 왕 미르타의 명령에 맞서 연인을 지켜냅니다. 새벽이 밝아오고 윌리들이 사라지자, 알브레히트는 지젤의 숭고한 사랑을 깨닫고 후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은 <지젤>은 발레 평론가이자 시인인 테오필 고티에의 대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고티에는 <독일, 겨울이야기>에서 숲속을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해 날이 밝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게 만드는 ‘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지젤>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지젤>의 대본을 받아 본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레온 필레 감독은 바로 <지젤>의 제작에 들어갔죠.
당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발레 마스터 장 코랄리가 안무를 맡아 <지젤>을 완성시켰습니다. <지젤> 초연의 주인공이었던 발레리나 카를로타 그리시의 연인이자 스승인 무용수 쥘 페로가 작업에 함께 해 솔로 동작을 안무했는데요. 쥘 페로는 초연 당시 그리시를 흠모하는 사냥꾼 힐라리온으로 열연하기도 했습니다. 지젤 역을 맡았던 그리시는 하룻밤 만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이후 꾸준히 지젤 역을 맡아 무대에 올랐습니다.
낭만주의 열풍이 그치자, <지젤>은 파리에서 점점 잊혔습니다. 이후 ‘발레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러시아 황실 극장에서 재공연하며 다시 관객들과 만나게 됐지요.
<지젤> 관람 포인트
<지젤> 속 ‘꽃’의 의미!
발레 <지젤>에는 데이지, 로즈메리, 백합이 등장하는데요. 세 꽃은 소품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각각 줄거리에 맞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처음 등장하는 꽃은 바로 데이지입니다. 데이지의 꽃말은 순수와 희망이죠. 지젤은 데이지 꽃잎을 떼며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알브레히트의 사랑을 점쳐보는데요.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결과가 나오지만, 알브레히트는 이를 무시하고 지젤을 다독입니다. 첫 장면에서 데이지는 지젤이 선망하는 순수한 사랑이자, 사랑의 좌절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사용됩니다.
윌리들의 왕 미르타의 이름은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의미하는 꽃인 라틴어 미르틀(Myrtle)에서 유래했습니다. 미르타는 알브레히트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지젤에게 죽음을 상징하는 로즈메리 가지를 들어 올려 보이는데요. 사랑의 힘 앞에 로즈메리는 이내 부러지고 맙니다.
지젤의 죽음 후, 알브레히트는 백합 한 다발을 들고 지젤의 무덤을 찾습니다. 지젤의 사랑으로 다시 한번 목숨을 구하게 된 알브레히트는 마침내 지젤의 숭고한 사랑을 깨닫고, 무덤가에 놓인 백합을 끌어안고 오열하죠. ‘순수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니기도 한 백합은 지젤의 간절함과 용서를 듯합니다.
음악을 들으면 숨겨진 복선이 보인다?
<지젤>의 음악을 맡은 사람은 당시 유망한 오페라 작곡가였던 아돌프 아당입니다. 익숙한 <O Holy Night>을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한데요. 아당은 <지젤>의 음악 속에 다양한 라이트모티프를 넣었습니다. 라이트모티프란 작품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적 동기를 말합니다. 아당은 지젤, 알브레히트, 힐라리온 등 인물의 주제뿐 아니라 줄거리 안에서도 라이트모티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주었는데요. 1막에서 지젤이 꽃잎을 뜯으며 알브레히트의 사랑을 점쳐보던 장면에서 연주되는 라이트모티프는 이후 알브레히트의 배신에 지젤이 정신을 놓아버리는 ‘매드 씬’에서 다시 한번 연주됩니다. 마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죠.
<지젤>의 하이라이트
1막 지젤의 ‘매드씬’
주인공 지젤은 순수한 첫사랑에 설레는 모습부터 사람이 아닌 ‘윌리’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이는 역입니다. 그중 지젤이 연인의 배신을 깨닫고 광란으로 치닫는 ‘매드 씬’은 극의 하이라이트로 꼽힙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현실을 부정하며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지젤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미어지게 하죠. 수준 높은 연기력을 요하는 장면이라 많은 무용수들이 꼭 도전하고 싶어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2막 윌리들의 군무
우리가 떠올리는 <지젤>의 이미지는 ‘시골 농민’ 지젤이 아닌 ‘영혼’ 지젤에 가까울 텐데요. 하얀 튜튜를 입은 무용수들이 선보이는 윌리들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기 때문인 듯 합니다. 32인의 무용수가 선보이는 영혼들의 춤이 바로 <지젤>의 백미입니다. 한 다리를 든 채로 여러 발레리나들이 교차하는 장면은 작품을 대표하는 장면이기도 하지요. 발레 블랑(백색 발레)라고도 불리는 낭만 발레의 정수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2021. 10. 29~31
평일 오후 7시 30분
주말 오후 2시, 6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유니버설발레단
올댓아트 변혜령 인턴
송지인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유니버설발레단, Wikipedia
참고|”처녀귀신은 어떻게 낭만발레의 상징이 됐을까, 발레 ‘지젤’“, 장지영, 올댓아트 칼럼
“Romantic Ballet: An Ethereal Art Grounded in the Material World“, 클래시컬 보이스, 202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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