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은 한국무용에서 중요한 소재로 쓰입니다. 전통무용이 무속과 제사에서 출발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려는 당연한 마음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만큼 흔하게 쓰이기도 했지요. 국립무용단은 2006년 <Soul 해바라기>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무당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강렬한 이미지와 더불어 삶과 죽음의 세계를 열고 닫는 능력자로서의 모습이 부각됐습니다. 국립무용단의 대표작으로 자리한 <Soul 해바라기>는 관객의 꾸준한 사랑에 힘입어 지난 2016년 10주년 기념 공연을 갖기도 했죠.
지난 11월 13일 막을 내린 국립무용단의 신작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도 무당(샤먼)을 그립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무당을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직업인의 모습입니다.
※ 2021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 서울 공연(11.11-11.13)은 종료되었습니다.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인생에서 특별한 일을 경험했을 때, 그 순간을 무속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과거에는 춤을 추는 사람이 무당이었던 것처럼, (무당이) 몸을 흔들고, 뛰고, 도약하고, 빙빙 도는 무의식의 세계가 무용수가 무대에서 춤을 추는 순간과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창작에 임했습니다.”
_손인영 예술감독
살다 보면, 한 번쯤 운명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손인영 예술감독은 이러한 경험을 ‘내림굿’에 빗대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무당에게서 신을 지우자 이야기는 모두에게로 확대됐습니다. 카펫과 커튼의 소재를 무대에 사용하고, 화려한 무복 대신 캐주얼한 셔츠를 입혀 ‘일상’을 첨가했습니다.
“처음부터 협업 작업을 생각했습니다. 전작 <다섯 오>는 ‘춤으로 풀어야겠다’라는 생각에 춤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총체예술로서의 무용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작품은 음악을 최소화하면서 이미지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잔잔하게 음악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하고, 움직임 없이 무대 장치로만 운명의 순간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_손인영 예술감독
손인영 예술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춤’이 전면에 나서지 않기를 바랐다고 덧붙였습니다. 총체예술로서 무용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아티스트들을 모아 창작진을 꾸렸습니다. 섭외 1순위로 떠올린 인물은 음악감독 장영규인데요. 장영규는 ‘이날치 밴드’와 ‘씽씽’ 등 국악과 <부산행>, <곡성>, <도둑들>, <타짜>, <보건교사 안은영> 등 영화·드라마 음악을 넘나드는 아티스트입니다. <회오리>와 <완월>로 국립무용단과 호흡을 맞춘 적 있는 그는 이번 공연에서 굿 음악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박자를 활용해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연출과 미술감독을 맡은 윤재원은 <보건교사 안은영>의 비주얼 콘셉트 작가,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HAEPAARY)’의 뮤직비디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한 연출가입니다. 그는 내림굿이 내밀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이라는 점을 고려해 카펫과 커튼을 활용해 무대를 연출했습니다. 무대 위 미장센을 완성하기 위해 조명 디자이너 여신동, 3D 영상 작가 김을지로, 사진작가 임효진이 합류했습니다.
더불어 이번 신작에는 국립무용단을 대표하는 무용수 김미애, 박기환, 조용진, 이재화가 조안무로 참여했는데요. 손인영 예술감독은 이들을 “국립무용단의 미래를 짊어질 유망한 무용수”라고 소개하며, “무용수들의 열정과 고민이 춤 속에 녹아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덧붙여, “(이번 신작은) 국립무용단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넓히는 작품”이라며, “롱테이크의 독립영화를 보는 듯한 잔잔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죠.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
훑어보기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내림굿’의 과정을 그립니다. 이 굿의 과정에는 무당의 세계에 입문하는 ‘입무자‘, 무당의 길을 먼저 걸어온 선배이자 굿판에서 입무자를 돕는 ‘조무자‘, 내림굿을 주관하는 ‘주무자‘가 등장합니다.
“느닷없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입무자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중심으로 잡으려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명확한 동작이 아니라 중심을 무너뜨리는 움직임을 사용했습니다. 조무자는 주무자가 되기까지 오랜 기간 수련이 필요합니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조무자들끼리 손에 손을 잡고 의지하는 모습이 농밀하게 표현됩니다. 주무자는 모든 일을 겪은 연륜과 근엄이 묻어나는 모습입니다. 정확하게 동작을 수행하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_손인영 예술감독
의상을 맡은 오유경은 주무자와 조무자에게 각각 내림굿에 필요한 부채와 방울을 쥐여주며 현대적인 해석을 더했습니다. 부채에 그려져있는 신의 모습은 심플한 푸른 그러데이션 무늬로, 방울은 방울이 달린 니트 소재의 모자로 변했습니다.
1막
커튼이 열리면 무대 위에는 일상이 펼쳐집니다. 적당히 조용히, 적당히 북적이며 흘러가는 세계는 주무자(장윤나)와 조무자(조용진)의 춤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주무자의 춤은 자신 있고 정확합니다. 조무자는 한 박자 늦게, 마치 스승의 움직임을 배우듯 주무자의 동작을 따라합니다.
작품의 주된 모티브는 황해도 강신무에서 왔습니다. 강신무는 신병을 앓아 내림굿을 받고 무업의 길을 걷게 된 무당을 일컫는 말로, 보통 자신에게 신의 계통을 이어주는 사람을 ‘신어머니’ 혹은 ‘신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유사가족이자, 사제지간이며, 같은 길을 가는 동료입니다. 손인영 예술감독은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인 이들의 관계성에 주목했습니다.
입무자들은 아직 이 주무자-조무자의 움직임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기울어지거나 뒤뚱거리고, 이해할 수 없는 핸드사인을 보내며 변화를 인식합니다. 흔들리는 듯한 움직임은 이들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대변합니다.
2막
내림굿을 받는 과정이 은유적으로 표현되며 주무자, 조무자, 입무자의 춤이 번갈아 등장합니다. 부채를 든 주무자의 춤은 무겁고 가라앉아 있습니다. 조무자의 춤에서 돋보이는 것은 연대입니다. 서로의 신체와 신체를 연결해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데요. 조안무로 참여한 이재화 단원은 메이킹필름을 통해 이 장면을 ‘믿음’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 메이킹필름 | YouTube
굿이 절정에 도달하면, 혼란스러운 움직임만을 보이던 입무자는 자신의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이 판에서 주무자와 조무자는 관객이 되어 새로운 무당의 탄생을 지켜봅니다.
주목해야 할 부분 중 하나는 음악입니다. 장영규 음악감독은 “영화 ‘곡성’의 마지막 장면에서 강렬한 굿 음악을 만들어 비슷한 느낌을 상상하시는 분이 많을 것 같다”며, “이번 작품도 같은 무속을 다루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오히려 단순하고 일상적인 음악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지요. 정신을 쏙 빼놓는 본래의 굿음악을 차용하는 편한 방법 대신, 굿음악의 박자에 현악기, 만화적인 효과음 등을 덧붙이는 새로운 방식을 택했습니다.
3막
무대 양 끝에서 폭 12m, 높이 8m의 대형 벽체가 회전하며 펼쳐집니다. 한쪽은 무구인 징의 놋쇠를 연상시키는 황동벽이고, 한쪽은 빌딩의 창문에서 흔히 보이는 유리벽입니다. 각각 무속 세계와 현실 세계를 상징하는 벽 사이로 무용수들이 걷기 시작하며 다시 일상이 펼쳐집니다. 입무자는 자신의 고통에 집중했던 사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한 모습입니다.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에는 우리가 ‘굿’에서 떠올리는 무아지경의 세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초현실적이고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지도 않지요. 오히려 절제된 모습으로 현실감각을 잃지 않는 모습입니다.
무당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간적 존재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문이죠. 그러나 문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손인영 예술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무당은 이별을 다루는 직업”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잘 ‘열어주고 보내주는’ 것이 무당의 삶입니다. 우리라고 다를 것 있나요. 우리를 스쳐가는 시간을, 일상을, 하루를 잘 ‘보내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 아니었나요.
작품은 제목처럼 출발하며 시작하고, 도착하며 끝납니다. ‘종점은 시점이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무당이 된 입무자는 일상에 도착해 새로운 일상을 시작합니다. 작품은 극장 문을 열고 나가며 다시 일상을 시작하는 관객에게 잘 다녀오라는, 따듯한 인사를 건넵니다.
올댓아트 변혜령 인턴
송지인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국립무용단
참고|”강신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당은 이별을 다루는 직업”…국립무용단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 2021. 11. 4,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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