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물의 관련이나 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때’ 혹은 ‘틀림없이 꼭’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죠.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던 국외소재문화재가 다시금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되는 순간, 바로 이 ‘필연’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각고의 노력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스쳐 지나가도 몰랐을 한 가닥의 ‘우연’을 단단하고도 굵직하게 이어 ‘필연’으로 만든 이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여전히 국외소재문화재는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안녕, 국외소재문화재>에서는 필연으로 우리의 곁에 돌아온 세 문화재를 소개하려 합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 한번 확인해 보시죠.
미국 작은 경매소서 발견한 초상화,
알고 보니…
2017년 10월, 온라인 경매시장을 사전 점검하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레이더에 한 초상화가 포착됐습니다. 양미간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힘을 준 강렬한 인상, 큰 코와 다문 입이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날카로운 표정. 처음 보는 인물이었지만 한국 사람이 모델이라는 ‘촉’이 왔습니다.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그 촉은 확신으로 바뀌었죠.
‘조상을 그린 한국 초상화(Korean Ancestor Portrait)’. 미국 남부 조지아주 서배너에 위치한 작은 경매사에서 내놓은 이 작품은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표범 가죽을 씌운 의자에 앉아있다”는 설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상’이 누구인지를 밝혀내야겠죠. 다행히 그림 오른쪽에는 주인공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적혀 있었습니다.
‘姜判府事 貞隱 己巳生 七十一歲 乙卯 九月 眞像.’
(강판부사 정은 기사생 칠십일세 을묘 구월 진상)
여기서 ‘판부사’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줄임말입니다. 조선시대 고급 관리들이 모인 중추부의 종1품 관직을 의미합니다. 고위 관료였다면 기록이 있었을 터. 이름으로 추정되었던 ‘정은(貞隱)’을 찾던 중 좌의정을 지낸 강노(姜㳣, 1809-1886)의 호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강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파의 핵심 인물로 분류되는데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까지 승진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강노의 증조부는 조선 후기 대표적 문인 화가이자 평론가로 시·서·화에서 모두 뛰어나 ‘18세기 예원의 총수’라 불렸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입니다. 김홍도(金弘道), 신위(申緯)의 스승이기도 하죠. 또 강세황은 진주 강씨 은열공(殷烈公)파 중시조인 고려 귀주대첩의 명장 강민첨(姜民瞻, 963-1021)의 후손입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강민첨과 강민첨의 16세손 강현(姜鋧, 1650-1733), 강현의 3남 강세황, 강세황의 장남인 강인(姜인, 1729-1791), 강세황 손자인 강이오(姜彝五, 1788-1857) 등의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한 집안에서 이처럼 많은 초상화가 한꺼번에 그려졌고 또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만약 강노의 초상이 더해지면 한 집안의 5대 초상화가 한자리에 모이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상황이었죠.
경매일까지는 1주일.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신속하게 전문가 평가위원회가 열렸고 논의 끝에 매입이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동시에 유물의 이력 조사도 진행됐죠. 그 결과 초상화가 애초 어떤 경로로 국내에서 반출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뉴욕시에 살고 있던 한 사람이 강노 초상을 포함한 자신의 재산을 가톨릭교회에 기부했고, 그 교회가 기부물품을 처분한 것을 또 다른 미국인이 구입해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현지로 파견된 초상화 전문가는 해당 그림이 진품임을 확인했습니다. 사진보다 훨씬 우수했고 보관 상태 역시 좋았다고 합니다. 특히 초상화 뒷면에 배채된 모습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배채는 밑그림을 그린 후 뒷면에 먼저 채색을 하여 색이 앞으로 비추어 보이도록 한 다음 앞면에 다시 색을 칠하는 방법입니다. 채색의 깊이가 더해지고 색을 잘 보존할 수 있어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종종 발견되곤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비단을 써서 배채를 하는데 강노 초상은 얇은 닥종이를 사용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습니다.
2017년 12월 국내로 들여온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됐고, 12월 19일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됐습니다. 5대에 걸친 초상화 주인공들이 모두 닮아있어 화제가 되었죠.
강노 초상은 71세 생일을 맞은 기묘년 9월에 그려진 것으로, 마맛자국까지 표현한 얼굴 묘사가 생생하고 인물의 기품과 성정을 섬세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소소한 정보들을 소규모의 경매사에서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곳에서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찾아냈으니 정말 ‘필연’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불 타 없어진 줄 알았는데…
15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왕실 유물
‘여섯 페이지의 필사본’이란 제목과 ‘1759년 결혼 관련 문서’라는 경매 도록의 단출한 설명.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짧은 글귀입니다. 그러나 ‘여섯 페이지의 필사본’이 바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이었고 ‘1759년 결혼이 기묘년에 조 씨를 왕세자빈으로 봉한다’는 내용이라면. 아찔합니다.
2017년 프랑스 경매사의 아시아 미술 경매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습니다. 가지런히 엮은 대나무 위 새기진 글씨, 위아래로 황금색 변철을 덧댄 이 사진 속 유물은 죽책(竹冊)이었습니다. 조선 왕실은 왕에게 존호, 시호, 휘호를 올릴 때나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을 책봉할 때 책을 제작했는데요. 대상이 왕이나 왕비이면 옥책을, 왕세자와 왕세자빈이면 대나무를 이용해 죽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왕실에서 엄중하게 관리해온 죽책은 민간에서 사사로이 비슷한 물품을 만들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이를 확인한 국외소재문화재단 관계자는 죽책의 주인부터 알아봤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1759년에는 ‘정조 봉왕세손 죽책’이 수여됐습니다. 그러나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내용이므로 ‘결혼’과는 무관하죠. 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책봉이 있었으나, 이는 죽책이 아닌 옥책으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두 책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돼 있는 상황이고요.
합리적 의심을 해봅니다. 바로 ‘1759년 결혼 관련 문서’가 잘못된 정보라는 것이죠. ‘기묘년’이란 세 글자에 집중해 다음 기묘년인 1819년의 기록을 찾아본 결과 ‘순조실록’의 순조 19년 10월 11일자에 기록된 죽책문의 내용이 경매사의 사진에 올라온 것과 일치함을 알아냈습니다.
사진 속 죽책은 ‘조만영의 딸 풍양조씨를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빈으로 책봉한다’는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효명세자빈은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로, ‘조대비’란 호칭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죽책의 모습 또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효명세자 가례도감의궤(孝明世子 嘉禮都監儀軌)』(1819)에 나온 것과 일치했습니다.
죽책을 경매에 내놓은 60대 프랑스인은 조부가 구입한 것을 보관해오고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그의 조부인 쥘 그룸바흐는 보석상이자 미술수집자였죠. 1930년대 파리 테부 거리에서 ‘막시마’란 이름의 상점을 운영했는데, 소장자는 조부가 당시 파리 고미술 시장에서 죽책을 구입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2002년 논문 「외규장각도서의 유래와 병인양요 직전의 소장 상태」에 따르면 이 죽책은 병인양요 당시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어 왔습니다. 어떻게, 다시, 부활했을까요.
역사를 토대로 프랑스와의 연결고리를 추적해봅니다. 1866년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은 강화도를 침략해 강화행궁 안에 있던 외규장각에서 의궤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 철수 전 행궁과 외규장각에 불을 질러 귀중한 문화유산을 모두 잿더미로 만드는 만행도 저질렀죠. 당시 약탈품의 목록과 수량은 보고서 형태로 파리 국방역사관에 남아있습니다.
「외규장각도서의 유래와 병인양요 직전의 소장 상태」 논문의 근거는 『정사 외규장각형지안(丁巳 外奎章閣形止案)』(1857)입니다. 이 안은 병인양요가 발발하기 9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이 외규장각에 봉안되었다는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로즈 제독의 전리품 목록이나 파리국립도서관 소장품 목록에는 이 죽책이 없었죠. 때문에 소실로 분류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여러 차례 평가위원회를 진행한 결과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의 진위와 가치에 대해서는 의심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한국으로 들여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겠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화재청과 국제법 전문가 등을 통해 검토한 결과 ‘구입’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병인양요 당시 유출된 것으로 의심이 될 뿐 직접적인 반출 근거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이미 오래전 시장에서 유통되어 개인의 소유물로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전적인 부분은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 사업에 전폭적인 후원을 해왔던 온라인 게임회사 라이엇게임즈의 후원금을 통해 해결되었습니다.
마침내 2017년, 파리에서 확인한 죽책은 사진으로 봐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로웠다고 합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와 명필이 쓰고 완성한 명품이니 당연한 말이겠지요. 죽책에 새겨진 글은 당시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지었고, 글씨는 서사관 이만수(李晩秀, 1752-1820)가 썼다고 합니다. 높이 25㎝, 너비 17.5㎝, 6장을 모두 펼친 길이는 102㎝. 다행히 재질, 서체, 인각 상태가 매우 뛰어나며,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이후 죽책은 프랑스 정부의 문화재 반출 행정 절차에 따라 2018년 1월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발간부터 귀환까지 꼬박 8개월이 걸린 작업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왕실의 의례용 도장인 어보(御寶)가 돌아온 적은 있으나, 옥이나 대나무로 제작한 어책이 들어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찐’사랑이었다…
나전은 자개를 무늬대로 잘라 목심이나 칠면에 박아 넣거나 붙이는 칠공예 기법을 뜻합니다. 특히 고려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워 불화, 청자와 함께 3대 미술품으로 꼽히는데요. 송나라 사절 서긍(徐兢)의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극히 정교하고 솜씨가 세밀하여 가히 귀하다(細密可貴)”는 극찬이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선 개국과 함께 화려함을 배격하고 청빈함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조되면서 고려 나전은 그 쓰임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1cm도 안 되는 문양 수백 수천만 개를 아교로 일일이 붙여 만들다 보니,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죠.
때문에 현존하는 고려 나전 칠기는 전 세계에 20여 점에 불과합니다. 이중에서 나전합(뚜껑이 있는 그릇)은 5점, 그중에서도 꽃잎 형태의 것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일본 교토의 사찰 게이슌인 소장품, 그리고 일본 개인 컬렉터의 소장품 등 고작 3점뿐입니다.
15년 전 일본 소장자의 갤러리에서 처음 본 순간 반했다. 정교한 이음새와 화려한 무늬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국화 꽃잎과 넝쿨무늬가 함 둘레를 수놓듯 새겨져 있는 나전합은 영롱하게 빛나는 전복패, 온화한 색감의 대모(玳瑁 바다거북 등껍질), 금속선을 이용한 치밀한 장식 등 고려 전성기 기법이 고스란히 반영된 수작으로 꼽힙니다. 최 이사장은 2006년 <나전칠기–천년을 이어온 빛> 전시를 통해 그 아름다움을 대중에 전하기도 했죠.
그러나 ‘빌려온’ 유물이었기에 그 기쁨 또한 한시적이었습니다. 나전합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고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최 이사장은 꾸준히 환수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립박물관에서 동국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고려 나전칠기를 입수할 수 있도록 초기부터 자문위원으로서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소장자와 본격적인 협상을 진행한 것은 2018년. 재단은 소장자의 안목을 높이 사고, 환수 후 국립기관에서 소중하게 보관‧활용될 것임을 강조하며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2019년 최 이사장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며 마침내 계약이 성사됐죠.
10㎝ 남짓한 길이에 50g를 넘기는 무게. 나전합의 용도는 확실치 않지만 12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환수된 나전합은 꽃잎과 이파리가 떨어져 나간 곳이 더러 보였지만 전문가들은 “변형 없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며 그 가치를 높이 샀습니다. 이 정도면 ‘해피엔딩 러브스토리’죠?
☞ 다음 편 예고 빼앗긴 총대장의 깃발, 136년만에 돌아오다
글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참고
‘강노 초상’ 美서 귀환…6대 초상화 한자리에(서울신문, 2017.12.20.)
美 지방 경매사에서 ‘강노 초상’이 140여년 만에 발견됐다(세계일보, 2018.10.09.)
150여년 만에 프랑스서 경매물로 등장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세계일보, 2018.9.18.)
15년 집념…일본에 있던 고려 나전합 들고 돌아왔다(중앙일보, 2020.7.3.)
세계에서 단 3점 뿐인 나전칠기, 800년만의 귀환…1.5~3mm의 ‘극초정밀‘ 예술(경향신문, 2020.8.5.)
또 다른 고려나전은 없을까… 일본 고미술시장을 주목하는 이유(세계일보, 20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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