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나아가 80-90대가 된다면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계획은 세워 놓으셨는지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새로운 직업을 갖기보다 ‘젊은 날 열심히 일했으니 노후에는 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들 갖고 계실 텐데요.
이런 생각을 무색케 하는 작가를 최근 만났습니다. 올해 90세를 맞은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인데요. 여러 작가들의 전시를 다녀봤지만 열정과 패기만 놓고 보더라도 연령이 그보다 한참 아래인 후배 화가들한테 전혀 밀리지 않았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 박서보 화백 –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PARK SEO-BO> 기자간담회에 박서보는 얼굴 곳곳에 작은 살색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났습니다.
“늙어서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런지 작업실에서 자꾸 넘어져. 얼마 전에도 얼굴과 팔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니까. 그럼에도 대작(大作)만 고집하는 나를 보며 남들은 ‘그렇게 힘든 거 왜 자꾸 하냐’고 그러는데… 무덤에 들어가서 후회하지 않으려는 거야.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할 목표로 작업 중인 200호짜리 대작이 있어. 아마 올해면 마무리가 될 것 같아요. 남은 내 인생을 걸고 꼭 완성하고 싶은 작품이야.”
몸은 세월을 비껴갈 수 없어 점점 노쇠해져 가지만 작가의 열정은 더 뜨거워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열정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박서보 개인전 <PARK SEO-BO>는 작가의 대표작인 묘법 연작, 그중에서도 2000년대 들어 정립한 후기 묘법(색채 묘법) 작품 16점을 전시합니다.
묘법 연작은 작가가 정의하는 것처럼 ‘수행의 결과물’입니다. 두 달 이상 물에 불린 한지 세 겹을 캔버스 위에 붙입니다. 한지 표면이 마르기 전에 굵은 연필로 선을 긋습니다. 이 행위로 산과 골의 형태가 만들어집니다. 물기가 마른 후 표면에 아크릴 물감을 수십 번 덧입히는 인고(忍苦)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이 탄생합니다.
그림은 수행의 도구다. 행위의 무목적성, 행위의 무한 반복성(반복적 수행) 등을 통해 파생된 물성을 정신화하는 것이 단색화다.
단색화의 거장이 설명하는 단색화의 정의입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이 작가에게는 ‘도를 닦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수도 없이 선을 긋고 물감을 덧입힙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이를 두고 작가의 딸인 미술심리치료사 박승숙은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아버지의 치열한 삶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
출판
인물과사상사
발매
2019.07.05.
힘들게 탄생한 작품들은 작가의 생각이나 말을 전하는 ‘자기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작품이 가진 정적인 에너지와 활력 속으로 관람객들의 스트레스를 빨아들이는 도구로 작동합니다. 박서보가 수행을 통해 비워낸 것들이 관람객들에겐 치유의 경험을 선사하며 일종의 선순환을 이룹니다.
자연의 색채를 작품 속에 들여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 박서보
이번 전시의 주제인 ‘색채 묘법’으로 화제(話題)를 돌려 보겠습니다. 연필 묘법에서 시작해 수행과 비움의 과정으로 진화해 온 작가의 작품 세계에 색이 본격적으로 스며든 데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동경 화랑에서 칠순을 축하해 주고 싶다고 해 칠순에 맞춰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해외를 그렇게 많이 다니면서도 다 일로 다녔지 관광이라는 걸 제대로 해보지를 못했어요.동경 화랑에 일본의 단풍이 보고 싶다고 했더니 후쿠시마현에 있는 반다이산을 소개해 줬습니다. 단풍이 절정이라 해서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보자마자 ‘으악’ 소리를 질렀습니다.
골짜기에서 새빨간 불길이 나를 태울 듯이 쳐들어 올라오는 느낌, 그 충격과 감동을 그림에 꼭 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이후로 작가는 자연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색상을 작품 속에 본격적으로 들여놓기 시작합니다. 삼청동 국제갤러리 K1의 창문으로는 공기색, 벚꽃색, 유채꽃색, 와인색을, 그리고 안쪽 전시장에서는 홍시색, 단풍색, 황금올리브색 등 박서보가 자연에서 화면으로 끌어온 색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까지 겹쳐 다들 답답하고 우울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평생에 걸친 비워냄의 과정을 통해 세계 속에 한국 단색화를 우뚝 세운 한 거장의 작품을 보며 위안과 용기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가뜩이나 스트레스 받고 힘든데 내 작품까지 기괴하고 복잡한 표현과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박서보의 지론(持論)이 대자연의 색상과 만나 관람객들의 마음을 은은하게 물들이는 전시입니다.
■ 박서보 개인전 <PARK SEO-BO>
2021년 9월 15일(수) ~ 10월 31일(일)
10:00 – 18:00
국제갤러리 서울(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문의 : 02)735-8449
올댓아트 구민경 인턴
권재현 전시팀장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ㅣ국제갤러리, 올댓아트 구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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