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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비파 필생의 역작…장대한 강산도에 펼친 통일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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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시나요. 어느덧 이틀만 지나면 연휴도 끝이네요. 이번 추석 연휴를 어느 때보다 바쁘게 보낸 작가가 있습니다. 오는 25일부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는 목판화의 대가 정비파(1956년生) 작가인데요.



    정비파 ㅣ작가 제공

    높이가 2.8m, 길이가 무려 32m에 이르는 ‘신몽유, 한라백두, 백두한라 통일대원도'(280×3,200, 한지 위에 아크릴, 유성목판) 2점과 2~4m 길이의 목판화 대작 28점, 그리고 원형 판목들을 3.5톤 트럭 3대에 실어 이번 연휴 기간에 서울 전시장으로 올려보냈습니다. 평소 인적이 드문 작업실이 모처럼 시끌벅적했다는데요.



    작업 중인 정비파의 모습 ㅣ작가 제공

    작업실이 딸린 경주 남산 자락의 시골집에서 매일 새벽부터 자정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는 작품에 파묻혀 산다는 정비파는 이번 통일대원도 완성에 무려 4년이 넘는 시간을 바쳤습니다. 통일의 염원을 담아 남녘 한라산부터 북녘 백두산에 이르는 한반도의 산하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목판에 새겨 한지 위에 찍어낸 목판화 작품인데요.



    작업 중인 정비파의 모습 ㅣ작가 제공

    60여 년의 작가 생활 동안 터득한 모든 기법과 역량을 총동원했습니다. 동양의 관념적 산수화도 보이고 실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서구의 사실주의 풍경화적인 요소도 보입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는 작가 특유의 방식으로 절충했습니다.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험준하고 역동적인 산세 표현을 통해 한민족의 웅장한 기상 또한 놓치지 않았습니다. 진이 빠질 정도로 정말 열심히 작업했다네요. 정비파 필생의 역작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정비파 개인전 <한백두 날아 오르다> 포스터 이미지 ㅣ작가 제공

    작품의 크기부터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정 작가는 “한국 미술계의 개인전 역사상 가장 큰 작품을 거는 전시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워낙 커서 작업실에선 다 펼칠 수 없는 까닭에 자신도 아직 작품의 전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그는 “통일대원도를 전시장에 펼쳐놓으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나도 기대가 크다”고 밝혔습니다.



    작업 중인 정비파의 모습 ㅣ작가 제공

    전시 준비에 한창인 그를 전화로 만났습니다.

    – 이번 전시의 제목이 <한백두 날아 오르다>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통일대원도를 보면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가 등장하지요? 천연기념물인 흰꼬리수리입니다. 한라산에서 날기 시작해 국토를 종단한 후 백두산에서 또 다른 독수리를 만나 한 쌍이 나란히 남녘으로 다시 회귀하는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배경을 역순으로 위·아래에 병치시켜 결과적으로 백두산과 한라산이 마주 보게 했습니다. 남과 북이 만나 하나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가운데는 독수리가 힘차게 날아가는 통로라고 보면 됩니다. 시련과 역경을 딛고 통일의 그날까지 달려가는 주체로 뭘 그려넣을까 고민하다가 독수리를 떠올렸습니다. 힘이 세니까요. 한라산의 한과 백두산의 백두를 따서 ‘한백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제가 직접 지었어요. 한민족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정비파 개인전 <한백두 날아 오르다> 포스터 이미지 ㅣ작가 제공

    – 웬만한 공간에선 펼쳐보기도 힘들 정도로 큰 작품을 만든 이유는 뭘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통일의 순간을 보고 싶다는 제 갈망의 크기입니다. 생전에 어렵다면 죽고 나서라도 통일의 그날은 반드시 와야 한다는 염원을 담았습니다. 날아오른 한백두(흰꼬리수리)가 창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통일 한국의 산하를 그렸습니다. 통일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상징하는 배경일 수도 있겠네요. 두 번째는 이런 열망이 일반 대중들에까지 가닿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작품이 클수록 관객들이 느끼는 감동의 크기도 커집니다. 압도적 크기의 작품을 통해 점점 사라져 가는 통일의 불씨를 지펴 보는 이들의 가슴 속에서 다시금 활활 타오르게 하고 싶었어요.”



    정비파 ㅣ작가 제공

    – 한때 순풍이 불어오는가 싶던 남북관계가 다시 얼어붙었습니다. 통일대원도를 작업해 온 지난 4년도 남북관계는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쳤는데요.
    “정치상황이나 국제적인 역학 관계 등 외적 구도가 순탄하지만은 않지만 신념이나 지향점 등을 끊임 없이 제기하고 환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외부 변수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빨리 통일이 됐으면 하고 바라지만 늦어지더라도 당장 제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그건 정치 등의 영역인 거죠. 평생 통일을 꿈꿔 온 한 개인으로서, 또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뿐입니다. 한 분이라도 제 작품을 보고 통일의 염원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거로 족합니다. 그게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입니다. 어차피 통일이라는 건 특정 세력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남과 북 어느 일방의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온 국민이 머리를 맞대고 남과 북이 뜻을 모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비파 개인전 <한백두 날아 오르다> 포스터 이미지 ㅣ작가 제공

    – 같은 배경을 담은 같은 구도의 작품을 색상과 제목만 달리해 두 점을 제작했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낮과 밤이라고 제목을 달았어요. 한백두의 시선에서 낮에 바라본 한반도의 산하를 그린 게 ‘낮’이고 밤에 바라본 풍경은 ‘밤’입니다. 한가람미술관 1관에는 ‘낮’을 걸고 2관에선 ‘밤’을 전시합니다. 같은 배경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같은 듯 다릅니다. 실제로 같은 공간이라도 낮과 밤의 모습은 분위기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도록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현장에서 육안으로 직접 보면 집도 있고 절도 있고 별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밤낮으로 달려가야 하는 통일의 여정을 표현한 겁니다. 밤낮 가리지 않고 24시간, 1년 365일 통일을 염원하는 제 마음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염원에도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통일담론이 쏙 들어갔습니다. 통일이라는 게 민족의 숙원이지만 남과 북이 대치하는 분단 상황에서 친북, 용공 논란까지 결부되면서 그간의 논의가 복잡하게 흘러온 것도 사실이고요. 분단이라는 현실이 사회적 현안의 생산적 논의를 가로막고 웬만한 의제들을 블랙홀처럼 모두 빨아들여 버리는 비이성적 상황도 안타깝지만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몽유 통일대원도>의 제작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 온 동인고 교사 김호룡은 “이 땅과 민중의 모든 모순과 질곡, 역사와 사회적 부조리의 근원은 분단이라는 게 정비파의 명징한 인식”이라고 말합니다. 분단의 땅과 시대에 태어났으니, 통일을 그림으로 담는 걸 운명으로 여기는 작가가 그 실천의 일환으로 이번에 내놓은 작품이 통일대원도라고 했습니다.



    정비파 ㅣ작가 제공

    정비파는 오랫동안 국토 연작을 통해 분단을 넘어 통일을 지향하는 작품을 선보여 온 작가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한국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치열한 역사의식이 강렬하면서도 차분한 미학적 메시지로 드러납니다.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는 일념으로 꺼져가는 통일담론에 묵묵히 불을 지핍니다.

    대표작인 통일대원도를 보노라면 198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민중미술 진영에 참여해 열정적인 작가들과 보조를 맞추면서도 예술성과 순수성 또한 놓치지 않으려 했던 정비파의 인생 여정과 작품 세계가 오버랩됩니다. 피폐한 민중의 삶과 시대상을 생생히 고발하는 수단으로 리얼리즘 목판화 작업에 매진했던 그의 작품들은 다분히 격정적이지만 흥분하거나 전투적이지 않습니다. 때론 서정적이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경주 남산 자락에 파묻혀 하루종일 작업에만 몰두하는 ‘변방의 작가’가 바로 접니다.
    말 주변도 별로 없고 사람 만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할 줄 아는 재주가 작품밖에 없어요.
    새벽같이 작업실로 출근해 자정 넘어 퇴근하는 생활을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작품 욕심이 많아서 작업 외에는 다른 데 눈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작가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임하고 있습니다.
    – 정비파 –



    작업 중인 정비파의 모습 ㅣ작가 제공

    최근 작가의 가슴을 뛰게 만든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백두산 사진을 보며>

    그냥은 가지 않으리라
    이대로, 분단의 사슬을 둔 채로
    남의 땅으로 돌고 돌아
    훔치듯
    그렇게는 가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끝끝내
    내 평생에 단 한 번을
    가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는 가지 않으리라

    한라에서 바라보는 백두의
    저 서늘한 눈빛
    우리가 그 눈빛을 닮아
    곧은길로만 가리라

    곧장 내달아 가리라
    분단의 오랜 고통 가신 뒤에야
    하나된 조국의 풋풋한 살 냄새 맡으며
    훠어이 훠어이
    통곡으로 가리라

    – 김시천 시인 –

    이번 전시를 준비하다 우연히 발견했는데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잘 대변하는 듯해 바로 시를 쓴 김시천 시인을 수소문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2018년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작가는 “꼭 뵙고 차라도 한 잔 나누고 싶었는데…”라며 당시의 심경을 전했습니다.

    “사모님께 전화 드려서 고인의 시를 꼭 도록에 싣고 싶다고 말했더니 허락해 주셨다” 

    이번 전시 도록에 김시천 시인의 시 <백두산 사진을 보며>가 실린 배경입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느라 모든 기를 다 뺏겨버렸다는 정 작가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전시는 못할 것 같다”고 했지만 어느새 다음 작품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구상은 이미 끝났고 전시가 끝나면 바로 착수에 들어간다는 계획까지 세워둔 상태인데요. 통일대원도가 창공에서 내려다본 한반도의 산하를 그린 작품이라면 다음 작품은 국토를 걸어가면서 목격하는 꽃과 풀, 바다와 나무는 물론, 민중의 삶과 풍속, 인물의 표정과 문화, 역사까지 다 담을 예정입니다. 현대판 국토답사화라고 보면 될 텐데요. 분단이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제주도부터 시작하는 답사 일정은 설악산 어드메에서 멈추지만 북녘 땅이 열리는 순간, 바로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작가의 목소리에 어느덧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정비파 ㅣ작가 제공

    ■ 정비파 초대형 목판화전
    <여정의 시작 : 한라에서 백두, 백두에서 한라 – 한백두 날아 오르다>

    2021. 9.25(토) ~ 10. 5(화)
    10:00 – 19:00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1,2전시실
    출품작 : 대표작 ‘신몽유 한라백두 백두한라 통일대원도’ 2점과 ‘욕망의 굴레’, ‘아!백두산 아!백두산’, ‘달빛 여정-한백두 날아 오르다’ 등 신작 30점, 작품의 원판 부조 26점 등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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