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을 굴려야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종이학>(전영록, 1982년)>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작품이길래 이리 공을 들여야 한단 말인가요?
최상철(1946년生)은 돌이나 철사에 물감을 묻힌 후 정확히 천 번을 굴려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천 번에서 약간 모자라거나 넘치지도 않습니다. 바를 정(正) 자를 그려가며 꼼꼼하게 개수를 확인해 돌을 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려 1999년도부터 이런 방법을 사용해 만든 작품으로 전시를 열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물건을 굴려가며 만드는 작업 방식은 그의 작가관에서 시작했습니다.
‘잘 그린 그림’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생각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 같이 그림을 잘 그리기만 해서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잘 그리려’ 노력하기보다는 ‘잘 그려지도록’ 노력했습니다.” – 최상철 작가
이건 또 무슨 말인가요? 한 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작가는 인위적인 개입이 없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작품 활동이란 감정 표현의 수단이 아닙니다.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철저히 ‘제3자’를 지향합니다.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욕망을 엄격하리만치 배제하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발견한 게 바로 돌을 굴리는 지금의 방식입니다. 작가를 직접 만나 자세한 작업 방식을 들어봤습니다.
먼저 작은 고무 패킹을 던져 돌이 구르기 시작할 위치와 방향을 정합니다. 양 끝에 ‘좌(左)’, ‘우(右)’라고 적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던져 돌이 캔버스의 어느 쪽에서 구르기 시작할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작가만의 ‘루틴’입니다. 다른 건 던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 단추를 꿰면 이제 돌을 굴릴 차례입니다. 한 번 굴렸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999번을 더 굴려야 합니다. 작가 마음대로 굴릴 수도 없습니다. 처음 굴렸던 방식 그대로 두 번째 굴리기를 이어갑니다. 고무 패킹이나 막대기를 던져 다음에 굴릴 방향을 결정하는 거죠.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거지요. 작가의 손에서 출발하지만 그는 절대 주도적 위치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작가는 “제가 하는 것은 제 그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라며 알듯 모를듯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리송한 작업을 1000번 내내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유일하게 개입하는 것은 ‘끝맺음’입니다. 천 번만 굴리고 더 이상 굴리지 않는다는 결정은 작가가 내리니까요. 이 작업의 유일한 규칙이기도 합니다.
왜 1,000일까?
‘1,000’이라는 숫자에 사람들이 종교적·철학적으로 부여하는 이미지가 있지만, 작가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그와는 상관없이 그냥 그렇게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거지요.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굴러가는 대로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보니 그 모습도 제각각입니다.
‘Mumool 21-8’을 보면 양쪽의 높낮이가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왼쪽으로 508번, 오른쪽으로 492번 돌이 구른 작품입니다. ‘Mumool 21-7’은 높낮이의 차이가 한눈에 드러납니다. 왼쪽으로 555번, 오른쪽으로 445번 돌이 굴렀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작품은 매번 달라집니다.
작가의 작업 과정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아래 동영상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의도를 배제한 작품이라고 의미까지 없는 건 아닙니다. 작가가 작품의 이름으로 정한 ‘무물(Mumool)’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혼돈의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작가는 이 혼돈의 시공간에는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무제한적으로 뒤섞여 잠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작가가 뭔가 개입하려는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그의 작품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무한대로 열려 있는 가능성에서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건 오롯이 관객들의 몫이고요.
아트스페이스3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와 함께 2020년 스위스 제네바의 AV 모던&컨템포러리 갤러리에서 열렸던 회고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담은 영문 도록을 다수의 독립서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고등미술학교(에꼴 데 보자르)의 학장이자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대안 대학교인 ‘모든 지식의 대학’ 설립자이기도 한 이브 미쇼(Yves Michaud)가 이 도록의 서문을 작성했습니다. 심상용, 박용택 등 두 미술 비평가의 글도 도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최상철 개인전
10월 28일(목) ~ 11월 27일(토)
10:30 – 18:00
*월요일, 일요일 휴무
아트스페이스3(서울 종로구 효자로7길 23 지하1층)
문의 : 02)730-5322
올댓아트 구민경 인턴
권재현 전시팀장
allthat_art@naver.com
자료 및 사진 ㅣ아트스페이스3, 올댓아트 구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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