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여전히 하늘길이 꽉 막혀 있지만 세계 미술시장은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문을 닫았던 박물관·미술관들이 조심스레 재개관에 나서는가하면 갤러리들도 소장품 전시나 기획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해외여행 길에 갤러리에 들러 사진을 찍고 예술의 정취에 흠뻑 빠져드는 건 어렵지만 온라인에 접속해 방 안에서 해외 유명 갤러리의 전시 작품을 둘러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하늘길이 제대로 열리는 날을 대비해 미리미리 갤러리와 작품 동향, 미술시장의 흐름 등을 파악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그래서! 올댓아트가 ‘해외 유명 갤러리 탐방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맘 같아선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현장의 감동을 생생히 여러분께 전달하고 싶지만 현실의 제약으로 일단 ‘랜선 탐방’으로 시작합니다. 세계 미술시장을 선도하는 갤러리를 한 곳씩 선정해 연혁과 특징, 소속 작가 현황,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 등을 살펴 보는 기획 시리즈입니다. 코로나 상황이 호전되기만 하면 언제든 현지로 바로 날아가서 연재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그날이 과연 오긴 올까요? ㅠ)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전 세계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선도하는 ‘가고시안 갤러리’를 살펴볼까 합니다. 가고시안 갤러리는 미국 뉴욕 맨해튼 첼시 지역에 3개의 지점을 둔 세계적인 갤러리입니다. 이곳은 크고 작은 갤러리 수백 개가 모여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오늘날 현대미술의 중심인데요. 비싼 임대료 등으로 갤러리들이 속속 첼시를 떠나면서 신흥 갤러리 지역들이 부상하고 있지만 맨해튼 첼시는 여전히 철옹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전통 강호의 대형 갤러리들이 건물 신축 등으로 후발 주자들의 새로운 도전에 맞서고 있거든요.
가고시안 갤러리는 첼시 지역 외에도 뉴욕에만 추가로 세 곳을 포함해 LA 비벌리 힐스, 파리(두 곳), 르 부르제, 런던(세 곳), 제네바, 바젤, 로마, 아테네, 홍콩 등 모두 18곳에 지점을 두고 세계 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습니다. 직원들 숫자만 300명이 넘는 가고시안 갤러리는 미술 시장의 흐름과 작가들의 작업실, 자택 방문 등을 통한 심층 인터뷰를 소개하는 온·오프 계간지를 발행하고 전 세계에서 해마다 열리는 주요 아트페어에 거의 빠짐 없이 참여해 작품을 출품하며 영향력을 계속 키워가고 있습니다. 사립 미술관이면서도 거의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을 능가할 정도로 수준 높은 기획력과 작품 동원력을 선보이며 ‘역대급’ 전시를 여는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페테르 파울 루벤스, 프란시스 베이컨, 윌렘 드 쿠닝, 파블로 피카소, 알베르토 자코메티, 로이 리히텐슈타인, 잭슨 폴록, 만 레이, 클로드 모네, 헨리 무어, 사이 톰블리, 앤디 워홀, 알렉산더 칼더, 루이스 부르주아, 루치오 폰타나 등이 모두 가고시안을 거쳐간 작가들입니다.
가고시안 갤러리는 LA에서 태어난 미국인 래리 가고시안(1945년生)이 1980년 창설해 지금까지 운영을 맡고 있는데요. 그의 집념과 돌파력이 오늘날 가고시안 갤러리의 위상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현대미술 시장의 흐름을 꿰뚫는 동물적 감각, 될 성싶은 작가를 알아보는 안목, 한번 인연을 맺은 작가의 작품은 직접 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가격 하락을 용납치 않는 자본력과 작가를 스타로 만들어 하나의 브랜드로 키워내는 기획력, ‘GoGo’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는 추진력,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전시 연출 구성 능력 등에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래리 가고시안은 2010년 영국의 미술 잡지 ‘아트 리뷰’가 선정한 ‘세계 예술계를 움직인 파워 100인’ 중 1위에 랭크될 정도로 전 세계 미술계가 예의주시하는 유력 인사 중 한 명입니다. 2011년 프랑스 예술 전문 신문 쥬흐날데자흐(Journal des Arts)가 뽑은 ‘세계 100대 예술 분야 영향력 높은 인물 평가’에서도 1위를 차지했고요. 2012년 미 포브스지(紙)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트 딜러’ 1위에 래리 가고시안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잡지는 2017년에는 가장 혁신적인 기업가 100인 명단에 그를 포함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UCLA) 영문학과를 졸업했는데요. 이때까지만 해도 갤러리 근처에도 얼씬거려본 적이 없다는 그가 전 세계 컬렉터들과 작가, 미술계 인사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그간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을지 짐작이 가지요? 늘 깔끔하고 세련된 수트 차림의 래리 가고시언은 판매 및 홍보 전략 면에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는 아트 딜러(미술품 중개인)인 동시에 슈퍼 컬렉터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틈만 나면 작가들의 작업실에 들러 현대미술의 최신 흐름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술계에선 갤러리나 아트페어처럼 작가들이 소비자들을 처음으로 직접 만나는 곳을 ‘1차 시장’이라 부르고 앤티크 샵이나 아트옥션처럼 컬렉터들이 내놓은 소장품을 판매하는 미술품 거래 시장을 ‘2차 시장’이라고 부르는데요. 세계 양매 경매업체인 크리스티나 소더비 경매에 나온 작품 목록을 담은 카탈로그에는 작품 설명과 함께 최근 소유자나 구매처를 알려주는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가고시안 갤러리’는 작품이나 작가의 가치를 입증하는 보증수표로 통합니다. 가고시안 갤러리가 구매한 적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술시장과 컬렉터들 사이에서 해당 작가와 작품의 가치가 쑥쑥 올라가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요.
이런 갤러리가 특정 작가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작품 가격을 떠받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작가들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생계비를 지원하는 등 남다른 후원까지 하고 있다면 미술계에서 그 작가의 위상이 어떠할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가고시안 군단’으로 불리는 가고시안 갤러리 전속 작가들의 진용은 그야말로 올스타급입니다. 토막 낸 상어의 사체를 포름알데히트 용액에 담근 작품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물으며 세계 미술계를 뒤흔들었던 데미안 허스트의 전시가 바로 가고시안 갤러리와 손을 잡고 기획한 작품입니다. 이를 계기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 아티스트로 우뚝 선 데미안 허스트 외에도 앤디 워홀, 잭슨 폴록, 무라카미 다카시, 신디 셔먼, 안젤름 키퍼, 사이 톰블리, 에드 루사, 리차드 프린스, 주세페 페노네, 리처드 세라, 테린 사이먼,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이 래리 가고시안이 발굴했거나 지금까지 가고시안 갤러리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전속 작가로 활동 중인 스타군단의 면면입니다.
백남준도 2015년 가고시안 갤러리와 계약을 맺고 전속작가로 활동한 적이 있고요. 프란시스 베이컨, 로이 리히텐슈타인, 사이 톰블리, 윌렘 드 쿠닝 등은 사후에도 여전히 가고시안 갤러리가 작품을 관리합니다. 래리 가고시안이 장 미쉘 바스키아를 한눈에 알아보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의 작품 3점을 바로 구매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 인구(人口)에 오르내립니다.
래리 가고시안은 한번 인연을 맺은 작가들과는 좀처럼 관계를 끊지 않고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작품을 팔아내는 추진력과 자본력, 탁월한 미술 시장 분석과 기획 능력 등이 뒷받침됐기에 이와 같은 신뢰 형성이 가능했겠지요. 래리 가고시안과 데미언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등과의 오랜 친분은 미술계에선 꽤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어요. 제프 쿤스나 쿠사마 야요이 등은 경쟁 갤러리로 소속을 옮겼거든요.
신진 작가 발굴보다는 시장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블루칩 아티스트들에게만 손을 내미는 가고시안 갤러리의 움직임과 관련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유명 작가들과 거대 갤러리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미술 시장의 편향성과 격차를 더욱 확대 재생산한다는 거지요. 온라인과 공동투자 등 새로운 거래 흐름의 확산과 더불어 스타 갤러리스트나 대형 갤러리의 위상이 예전 같지는 않다는 지적에도 소속 작가나 전시의 수준, 출품작의 규모 면에서 가고시안 갤러리는 여전히 세계 ‘톱클래스’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참고 ㅣ가고시안 갤러리 공식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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