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은 한순간에 탄생하지 않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예술이 꽃 필 수 있도록,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중장기 창작지원을 통해 공연예술 단체를 최대 3년간 지원합니다. 올댓아트가 그 단체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피지컬 씨어터. 무대 위의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대부분의 텍스트를 이미지화해 신체적인 움직임으로 선보이는 연극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 2007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연극 <보이첵>이 최우수 피지컬 씨어터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피지컬 씨어터는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용어였다. 그러나 이름에서부터 당당하게 예술의 지향점을 확실하게 드러낸 사다리’움직임’연구소는 끊임없이 우리 사회 속에 늘 존재하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이 움직임들을 모아 가장 예술적인 형태로 재탄생 시키며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 갔다. <보이첵> 외에도 <휴먼코메디>, <크리스토퍼 논란 클럽>, <카프카의 소송>, <한여름 밤의 꿈>, <굴레방다리의 소극> 등의 공연으로 극단의 뚜렷한 색깔을 드러내왔다.
지난 2019년부터는 중장기창작지원사업에 선정돼 연극 <태풍>을 선보이고 있다. 해당 작품은 3차 공연까지 계획됐으며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매 회차마다 더 완벽한 무대를 만들겠다는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포부가 담긴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태풍>에는 ‘움직임’ 외에도 관객이 주목해야 할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태풍>은 셰익스피어의 고전 <템페스트>를 독특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동양과 서양의 적절하면서도 오묘한 조화를 담았으며 요즘 그 어떤 장르에서도 빠질 수 없는 전통과 현대의 융합도 돋보인다. 특히 스토리와 음악 외에도 의상과 가면, 무대장치에서도 이 조화로움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난생처음 보는 가면을 쓰고 봉산탈춤을 추기도 하고,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사극 작품인가 싶지만 그 시대 배경이 모호해 더 기묘하다.
새롭지만 또 우리의 ‘정체성’이 들어간 연극을 제작하기 위해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다리움직임연구소. 미래지향적인 움직임과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절대 전통의 것을 놓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봉산탈춤의 현대화부터 배우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카데미까지, 다양한 예술적 목표로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임도완 대표를 만나 피지컬 씨어터와 향후 연극계의 방향성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1998년도에 극단 사다리에서 분리돼 나왔습니다. 움직임에 집중한 작품들을 선보였고 자연스레 피지컬 씨어터 전문 극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피지컬 씨어터’라는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게 된 건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보이첵>을 공연한 이후인데요.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움직임을 연구하고 추출하고 또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하는 극단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대사가 없다거나 하진 않아요. 다만, 움직임이 무대의 주요 언어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극단이 정확하게 정의하는 ‘움직임’은 무엇인가요?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말해요.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연극에 작렬하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연구하고 추출한 움직임들을 어떻게 이미지화 시켜 무대 위에 드러나게끔 만드는가예요.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모든 텍스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움직임을 찾고, 또 그것들을 다시 텍스트와 병합하는 과정도 거쳐요. 움직임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긴 매우 힘듭니다. 그걸 정의하는 과정 자체가 저희 극단이 지금 하고 있는 ‘움직임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표정과 대사로 연기하는 것을 지양한다고 들었어요.
표정과 인상을 써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아주 쉬운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연기는 훈련된 연기자가 아니어도 누구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좀 단적으로 말한다면 매우 일차원적인 연기라고 생각해요. 표정을 쓰지 않고 맡은 인물의 생각과 상태를 드러내는 게 훌륭한 연기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 모두 가 거의 잘 아는 국내외의 대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거의 중립 마스크와 같이 표정과 인상을 쓰지 않고 연기하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즉 감정을 제일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얼굴과 표정을 써서 나의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 연기라고 할 수 있죠.
그것을 저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관객들은 설명하지 않고 그 ‘상태’로 드러내는 연기에 압도 당하잖아요. 또 대사, 표정, 무대장치와 음악 등 모든 걸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버리면 관객들이 극 안에 참여할 공간이 없어져요. 관객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여 찾고 참여할 수 있도록 공간을 관객에게 할여해야 합니다. 특히나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연극이, 볼거리 많은 이 미디어 홍수 시대에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합니다.
중장기창작지원사업 목표로 내세운 ‘전통의 현대화’가 요즘 예술계 다양한 분야에서 유행인데요. 유독 사람들이 전통과 현대의 조화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우리의 것’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그 자치가 남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것으로 한국의 우수성을 드러내길 매우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우리의 것(우리 전통)’이 세계적이면 ‘남의 것(다른 나라의 전통)’도 세계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이젠 ‘우리의 것’, ‘남의 것’ 할 것 없이 이 모든 걸 어우르고 통합하여 새로운 언어를 창출하고 그것이 세계적인 언어로 펼쳐지고 있는 시점이라고 봅니다. 때문에 전통과 현대의 조화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융합을 보여주는 ‘새로움’ 찾기의 목적성이 많은 분야에서 대두되었고 또 그러한 결과물에 대해 대중이 더 크게 반응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실험들은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머무르지 않고 또 변화와 도약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번 프로젝트 사업으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재해석한 <태풍>을 준비했는데요. 왜 많은 고전 작품 중에 <템페스트>를 선정했는지 궁금합니다.
연출가로서 꼭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작품이었어요. 또 <템페스트> 속 ‘태풍’이라는 움직임을 무대 위에 올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기도 했고요. 여기에 앞서 말씀드린 큰 포부까지 더해졌죠. 서양 작품에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더해 더 극적인 현대화를 보여줘야겠다는 목표요.
<태풍>에 봉산탈춤을 녹여낸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이전부터 봉산탈춤에 관심이 많았나요?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봉산탈춤을 현대화해 동시대의 문화로 새롭게 구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봉산탈춤 7개의 과장을 모두 현대화하는 작업과 함께 가면도 답답하지 않은 이탈리아 ‘코메디아 델아르떼’ 반가면을 쓰도록 하고요. 또 봉산탈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가치가 뛰어난데 그걸 시대의 흐름에 의해 형식이 변화되지 않았죠.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봉산탈춤을 공연을 한 후, 모든 가면을 그 불에 태웠어요. 어떤 액을 막기 위한 행위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막걸리는 빠지지 않았었던 같고요. 그래서 그 움직임이나 춤, 대사 등이 매우 자유로웠다고 생각해요. 그날은 양반을 패러디하고 발산하는 날이었겠지요. 때문에 실제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만들었을 것이고 그 움직임과 동작들이 잘 짜인 형식적인 것을 거부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일본의 가부키나 노의 경우엔 극도의 형식미를 전통음악과 움직임을 통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고 세계적인 것이 되었죠. 그 극도의 형식미가 너무 얄미울 정도죠. 일제 강점기가 없었다면 우리의 탈춤도 형식적인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보기도 해요. 그래서 그 간극을 상상력으로 메꿔 동시대의 봉산탈춤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본 지원 작품도 그러한 의미에서 가면과 움직임 그리고 음악을 실험하는 의미도 있었어요.
공연 속 모든 장치에서 동·서양과 현대·전통문화의 조화를 발견할 수 있어요. 특히 가면과 의상에도 이 요소를 녹여내기도 했고요.
네, 특히 제가 추구한 동·서양과 현대·전통문화의 적절한 중간 지점을 발견해 가장 예술적인 조화를 구현하는 게 어려웠어요. 또 가면과 의상은 그 과정이 더 복잡했고요. 조화를 이뤄내면서도 전체적인 무대 의상의 통일성을 잡아내는 게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얼굴 전체를 덮는 봉산가면을 반가면으로 다시 만드는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어요. 배우들의 얼굴에 맞게 제작하고 또 얼굴에 착용하고 연기를 했을 때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지도 관찰하고요. 몇 번씩이나 석고를 부어서 가면을 제작하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대나무라는 오브제를 사용해 공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게 사다리움직임연구소만의 특징이기도 해요. 이번 무대 변화는 어떤 식으로 기획하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템페스트>라는 작품을 생각하면서부터 대나무를 오브제로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나무가 공간을 결정짓고 변화하는 그림을 상상해봤는데 꽤 괜찮을 것 같았어요. 사실 해외에서 올린 <템페스트> 공연들을 보면 대부분 무대가 화려해요.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 환상적인 섬의 모습을 구현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희는 그렇게 다채롭게 무대장치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대나무’가 장면의 변화를 보여줄 좋은 요소였죠. 가장 까다로웠던 점은 대나무가 직선이잖아요. 그래서 곡선의 형태를 나타내는 게 힘들어요. 그래서 그 직선들의 움직임으로 곡선을 표현하려고 했죠. 공간의 확장과 축소도 동일하게 시도했고요.
<템페스트>를 각색해서 보여준 인물의 변화와 시대 배경의 모호함도 재밌었어요.
<템페스트>가 판타지잖아요. 누구는 섬으로 쫓겨나고, 또 누구는 사랑에 빠지고, 그랬다가 마술도 부리고, 화해도 하는 그런 종합적인 작품이에요. 이걸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이야기처럼 선보일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나온 결론이 시대 배경을 일부러 모호하게 하자는 거였어요. 정확한 시대를 특정해서 하면 오히려 판타지스러운 면들이 사라질 것 같았어요. 또 작품 속 요정 ‘에어리얼’을 두 명의 캐릭터로 나눴어요. ‘흑’과 ‘백’이라는 명확한 구분을 준 이유는 동양에서는 음과 양의 조화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개념을 모든 것을 조화롭게 이루어내는 ‘에어리얼’의 인물에게 부여를 했죠.
2020년부터 <태풍>을 기다린 관객들도 많았는데 코로나19로 취소되면서 아쉬움이 컸을 것 같아요. 사다리움직임연구소는 다사다난했던 2020년을 어떻게 보냈나요?
많이 힘들었죠. 공연 취소도 아쉬움이 많았고 공연 연습 때도 제약이 많았어요. 모두들 조심해야 하는 상황인데, 생계인 공연을 놓을 수는 없으니까 무섭고 고통스러웠어요. 배우들도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한꺼번에 많이 모여서 연습을 못하니까 무대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가 쉽지 않았어요. 또 이럴 때일수록 연극이 새로운 걸 발명해야 할 때가 왔구나 싶기도 해요.
아마 전자기기가 없었던 옛날에는 연극이 굉장히 재밌었을 거예요. 내 인생도 아닌 남의 삶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까 연극이 얼마나 짜릿했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 대세잖아요. TV만 켜도 다른 사람들의 가장 사소한 일상까지 다 볼 수 있어요. 이런 급변하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연극도 새로운 걸 발명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할 시기가 정말 온 것 같아요. 연극은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장기창작지원사업은 최대 3년까지 지원해 준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현실적으로 어떤 도움이 됐는지도 궁금합니다.
3년이 굉장히 긴 시간이에요. 지금껏 지원 제도들은 꾸준히 있었지만 재지원 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사업 하나를 꾸준히 발전해 나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3년이라는 시간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조금 더 편하게 원하는 작품을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어요.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2021년 계획도 알려주세요.
우선 신작을 선보이기보다는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이 현재 갖고 있는 공연들로 지방 공연을 계획 중에 있어요. 또 <휴먼코메디>를 영상으로 촬영해서 서울시가 주최하는 <문화로 토닥토닥- 찾아가는 공연> 유튜브 채널에 1년간 개제할 예정이에요. 원래는 정말 말 그대로 직접 찾아가야 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이렇게 대체하기로 했어요. 또 <태풍>은 8월에 3차 공연 예정인데요. 감사하게도 거창연극제에서 초청작으로 관련해 연락이 와서 아마 그때쯤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도 <태풍>을 3년간 개발해온 만큼 좋은 레퍼토리 공연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사다리움직임연구소가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다리움직임연구소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어요. 단순한 입시 학원이 아니라 우리 극단이 갖고 있는 시스템을 활용하고 싶은데요. 배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와서 재교육을 받는 그런 곳이요. 또 극단의 특성상 프랑스 자크 르콕(마임, 움직임, 오브제, 가면 등을 기반으로 한 국제적인 연극 학교) 시스템을 기반으로 커리큘럼이 만들어질 것이고, 매우 창의적인 연극학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올댓아트 인턴 강나윤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사진ㅣ사다리움직임연구소
공동기획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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