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은 한순간에 탄생하지 않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예술이 꽃 필 수 있도록,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중장기 창작지원을 통해 공연예술 단체를 최대 3년간 지원합니다. 올댓아트가 그 단체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최근 공연계의 화두 중 하나는 배리어 프리(barrier-free)입니다. 배리어 프리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생활에 지장을 주는 물리적‧심리적 장애물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의 점자나 계단의 경사로도 배리어 프리의 일종이라 할 수 있죠. 공연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이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통역, 문자통역이 대표적입니다. 아직 모든 공연에서 실시되고 있진 않지만, 공공극장을 중심으로 배리어 프리 공연이 조금씩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성해설과 문자통역이 있다 해도, 과연 우리는 모두 같은 공연을 경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어떤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고, 어떤 대사를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지 몰라도, 비장애인과 장애인 관객이 느끼는 감각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차이에 주목하고 새로운 형식의 배리어 프리를 시도하고 있는 극단이 있습니다. 윤혜숙 연출이 이끄는 래빗홀씨어터인데요. 청소년의 임신 중단을 다룬 <마른 대지>,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에서 분투하는 두 여성을 그린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 등으로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극단이죠.
래빗홀씨어터는 작년부터 중장기 창작지원을 통해 ‘Common Sense: 감각을 잇는 극장’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윤혜숙 연출이 추구하는 배리어 프리는 완성된 공연에 그저 통역을 얹는 것이 아니라, 제작 단계부터 장애인 관객들과 함께 감각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고려해 연출한 공연입니다. 지난해 공연한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와 <마른 대지>를 이러한 방식으로 선보였는데요. 그 자세한 내용을 아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해 보시죠.
래빗홀씨어터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래빗홀씨어터라는 이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안내했던 토끼 굴에서 따왔습니다. 극장이 관객들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세계로 안내하는 통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어요. 작지만 풍성한 연극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영상 등 다양한 매체가 등장하고 있는데, 연극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어요. 2017년에 1인 극단으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배우 강혜련, 조의진, 김원정, 연출부 김태령과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래빗홀씨어터의 대표작을 꼽아보자면 어떤 작품들이 있을까요.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예요. 강화길 작가의 단편소설 <방>을 원작으로 한 작품인데요. 어느 날 알 수 없는 폭발로 폐허가 된 도시에 두 사람이 복구 작업을 하러 오는 내용입니다. 가장 최근 공연이 2020년 2월이었는데, 코로나19가 막 심해질 때였어요.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마스크를 쓰고 보러 오신 관객분들을 보며 묘한 기분을 받았죠. 래빗홀씨어터가 추구하는 ‘작지만 풍성한 연극’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공간을 비우고 다섯 개의 나무 상자만으로 여러 공간을 표현했어요. 관객들이 상상으로 여백을 채울 수 있도록요.
두 번째는 <마른 대지>가 떠오르는데요. 청소년의 임신 중단에 관한 작품이었어요. 래빗홀씨어터 공연에선 보통 세트를 많이 두지 않는데, 이 작품은 배경이 되는 수영부 탈의실을 아주 사실적으로 구현했습니다. 희곡이 굉장히 좋은 작품이에요. 청소년의 임신 중단이라는 소재를 생각하면 흔히 여성을 원치 않는 임신을 한 피해자로 그린다거나, 그를 둘러싼 부모님, 또는 남자친구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 많은데요. 여기선 주인공 에이미가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해나가고, 옆에서 도와주는 에스터와의 관계가 굉장히 섬세하게 묘사돼요. 그런 점이 관객분들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배우분들이 낭독, 초연, 재공연을 거치면서 희곡에선 알 수 없던 부분까지 아주 잘 표현해 주셨어요.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는 여성 퀴어 커플의 이야기를, <마른 대지>는 청소년의 임신 중단을 그리는데요. 작품 선정 과정에서 소수자의 이야기에 특히 주목하는 편인가요?
아무래도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하는 곳이 어디일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주제 말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말을 걸 수 있는 주제가 뭐가 있을지 고민하고 작품을 고르는 편입니다.
이번 중장기 창작지원을 통해 ‘Common Sense: 감각을 잇는 극장’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최근 배리어 프리 공연들을 보아왔는데요. 대부분 시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음성해설이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 또는 문자통역이 도입된 공연들이었어요. 그런데 이건 제작 초기부터 배리어 프리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공연은 공연대로 만들어지고 마지막에 통역과 해설을 덧붙인 것이죠. 때문에 공연의 내용은 설명이 되지만, 이게 과연 장애인 관객들에게 ‘감각적으로’ 전달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중장기 창작지원을 통해 감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저희가 세운 원칙은 제작 단계에서부터 배리어 프리 공연을 염두에 두는 것, 즉 작품을 그냥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어요. ‘Common Sense’라는 이름은 ‘상식’이라는 뜻인데, 제작 초기부터 배리어 프리로 만드는 것이 공연계에서 상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단어를 따로 놓고 보면 ‘공동의 감각’이라고도 해석되는데, 제한적인 감각을 가진 관객들도 차별받지 않고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공동의 감각’을 찾아보자는 의미도 있어요.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와 <마른 대지>를 이런 방식으로 제작하셨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동의 감각’을 찾아나갔나요?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관객 모두와 동시에 감각적으로 소통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시각장애인 관객과 소통하려면 청각적 요소가 필요한데 그러면 청각장애인 관객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선 지원 사업 중반까지는 시각장애인과 소통하는 공연 제작을 목표로 두고, 청각적 요소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예를 들면 <마른 대지>는 배경이 수영장 탈의실이고, 무대 뒤편이 수영장으로 설정되어 있어요. 훈련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한쪽 스피커에서만 소리를 틀었죠. 이런 식으로 음향을 굉장히 세심하게 연출했습니다. 또, 두 공연 모두 공연 전에 무대 세트 모형을 음성해설과 함께 만져볼 수 있는 ‘터치 존’을 운영했습니다.
실제 장애인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저희 공연을 보신 장애인 관객분께서 한 매거진과 인터뷰하신 내용을 봤어요. 따로 해설이 없어도 감각적으로 공연을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이 배제되거나 소외되지 않아서 좋았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죠.
지난해 10월 공연된 <춤의 국가>에는 청각장애인 무용가 안정우가 출연하기도 했는데요. 두 분의 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제가 혜화동 1번지 7기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작년 페스티벌 주제가 ‘장애인 창작자와 함께 공연 만들기’였어요. 저는 <춤의 국가>를 공연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과 잘 맞는 창작자가 누구일까 수소문하던 끝에 안정우 배우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춤의 국가>는 10대 청소년 댄스 팀이 전국 대회에 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의 작품이에요. 배우들 중 안정우 배우만 실제 무용수라서, 군계일학이었죠. 안정우 배우가 맡은 인물은 소개에 따로 청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은 없어요.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알아온 익숙한 친구, 그런데 청각장애를 가졌을 뿐인 그런 인물로 생각했죠. 그래서 다른 인물들도 이 친구와 소통하는 방법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그런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안정우 배우님은 잔존 청력이 있어요. 보청기를 끼면 어느 정도 들리고, 입술을 읽어서 의사소통을 하시거든요.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를 끼고 연습을 하다 보니 소통이 어려웠죠. 입술이 보이는 투명 마스크도 사용해봤지만 연습을 하다 보면 습기가 차서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래서 빔 프로젝터를 빌려서 그때그때 하는 말을 문자로 통역해서 띄웠어요. 연습 일지도 매일 정리해서 드리고, 최대한 소통을 위해 노력했죠. 그런데 극장에서도 음성으로 전달하는 신호가 많더라고요. 리허설할 때 갑자기 조명이 꺼지는 경우가 생기면 “암전 됩니다!”라고 말로 외치거든요. 아르코예술극장 같은 큰 극장도 장애인 배우들과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어요.
작년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할 때 “윤혜숙은 관객들을 편안한 감상자로 절대 놔두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는 심사평을 받았는데요.
사실 그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추구하는 연극은 무대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분이 제 공연을 보면 이상하게 시간이 늘어지는 장면이 꼭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런 여백이 발생할 때 관객들이 그걸 채워 넣는 시간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마른 대지>의 경우에는 관리인이 탈의실의 낙태 현장을 치우는 장면이 있어요. 아무 대사 없이 양동이랑 쓰레기봉투를 들고 와서 피 묻은 신문지를 치우는 장면인데, 6분 30초 동안 실제 시간과 똑같이 진행되거든요. 그럴 때 관객들이 이입할 여지가 확 생기는 것 같아요.
연극에는 어떻게 처음 관심을 갖게 됐나요?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 행사가 있으면 당연히 제가 주인공을 맡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활발하고 나서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중학생 때 문화산책부에 들어갔는데, 인기가 없어서 가위바위보 진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었거든요. (웃음) 그런데 그때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공연들을 정말 저렴한 가격에 많이 봤어요. 라이선스, 창작 뮤지컬을 가리지 않고 좋은 작품들을 많이 봤는데 그게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원래는 뮤지컬 배우를 하고 싶었는데, 대학은 인문계로 들어가게 됐어요. 대신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의 길에 접어들게 됐습니다.
중학생 때 본 작품 중 어떤 작품이 제일 인상 깊었나요?
뮤지컬 <그리스>요. 제일 처음 본 뮤지컬이었는데, 그 작품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 연출하고 있는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데요?
삶과 만나다 보니 인생은 그렇게 밝기만 한 게 아니더라고요. (웃음)
래빗홀씨어터의 추후 공연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6월 초에 <숨>이란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요. 세월호 유가족분들과 같이 워크숍을 하고 그걸 토대로 만든 공연이에요. 같이 몸을 풀고 명상과 산책을 하고 글을 쓰는 워크숍이었는데요. 그분들이 직접 출연하지는 않지만, 그 시간들을 바탕으로 배우들이 풀어나가는 작품입니다.
래빗홀씨어터를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을 통해 작품을 읽어요. 그래서 어떤 작품에 들어가면 그 주제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배워나가죠. 공연을 한편 한편 할수록 내가 몰랐던 세상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관객분들도 저희 공연을 통해서 관심의 영역을 넓히셨으면 좋겠어요. 창작자와 관객 모두 지평이 조금씩 넓어지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연극 <숨>
2021.6.3 ~ 2021.6.8
서울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공연 시간 90분
8세 이상 관람 가능
올댓아트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공동기획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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