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창작 뮤지컬 <금악>이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첫 선을 보였습니다. <금악>은 조선 순조 말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시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 뮤지컬로, 궁중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던 장악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극은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리는 장악원 악공 ‘성율’이 금기의 악보 ‘금악’을 해독하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세도 정치의 중심 김조순과 효명세자 이영의 대립, 크게 두 축으로 진행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소리가 있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전 경기도립국악단)이 처음으로 제작한 뮤지컬인 만큼, <금악>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바로 ‘음악’입니다. 극에서 음악은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이자 장악원이 표방하는 ‘예악’과 통일신라부터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숨겨진 악보, ‘금악’으로 대비됩니다. <금악>은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음악적 질서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바로 ‘음악은 사람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니 음악에는 윤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인데요. 우리나라도 음악이 사람의 정서에 미치는 변화의 위험성을 경계해 음악의 규범적 원칙과 전통적 계승을 중요하게 여겼죠.
스승 홍석해, 친구 임새와 산골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성율’은 세상의 많은 소리를 구별하는데 큰 재능을 가졌습니다. 툭하면 산세 높은 곳에 올라 자연에서 나는 모든 소리를 듣곤 하죠. 성율에게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스승 홍석해를 찾아온 김조순을 통해 여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장악원 악공이 된 성율의 재능은 금세 눈에 띕니다. 궁궐에는 율의 재능을 통해 세상을 예악으로 통치하고자 하는 세자 이영이 있는가 하면, ‘금악’을 해독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외척 김조순이 있죠.
김조순이 건넨 금악을 해독한 율은 결국 욕망을 먹고 자라는 ‘갈’을 만나 자신의 과거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던 성율은 결국 예악과 금악, 질서와 욕망, 허락과 불허의 세계를 모두 탐험한 뒤 마지막에 이르러 외칩니다. “노래하라,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주인공 성율 역에는 파워풀한 가창력을 선보이는 배우 유주혜와 고은영이 캐스팅되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세도정치 시기, 예악으로 태평성대를 꿈꿨던 효명세자 이영 역에는 서울예술단 출신의 배우 조풍래, 크로스 오버 그룹 라비던스의 멤버 황건하가 분했습니다.
사람들의 욕망으로 자라나는 ‘갈’ 역으로는 ‘추다혜차지스’의 추다혜, 300여 명이 넘는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윤진웅이 출연합니다. 한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배우 남경주가 관현맹인 홍석해로, 경기도극단 소속의 연극배우 한범희가 김조순으로 무대에 오릅니다. 율과 함께 자란 죽마고우 임새 역으로는 소리꾼 조수황이 발탁됐습니다.
이 외에도 약 30여 명의 앙상블과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로 구성된 32인조 오케스트라가 출연해 극의 현장감을 더합니다.
<금악>, 어디까지 실제일까?
역사 TMI
‘사기캐’ 효명세자 이영
사극 판타지 뮤지컬 <금악>에서는 시대와 장소는 물론, 극 곳곳에서 실제 역사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극의 배경이 되는 조선 순조 시기는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권력을 잡아 세도정치의 문을 열던 때였습니다. 왕권이 힘을 잃던 시절, 순조의 기쁨은 바로 아들 효명세자였죠.
실록에 따르면, 효명세자는 영특하고 외모까지 출중한, 그야말로 ‘사기 캐릭터’였습니다. 순조실록은 세자의 용모에 관해 “세자는 이마가 솟은 귀한 상이었고, 용의 눈동자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순조는 왕위에 오른 지 27년이 되는 해에 19세의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합니다. 이에 신하들은 “세자의 예덕이 날로 새로워지고 아름다운 소문이 계속되니, 왕의 성명에 기뻐 발을 구르고 춤을 추게 되었다”며 입이 마르게 세자를 칭찬합니다.
성군의 자질을 보였던 효명세자가 두각을 나타낸 또 다른 분야는 바로 ‘예술’입니다. <금악>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효명세자는 나라를 예악으로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춤과 음악을 통해 질서를 나타내고, 다양한 행사를 통해 기강을 잡아나갔지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음악과 춤을 직접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금악>의 하이라이트 진찬연 장면에서 나왔던 바로 이 춤도 세자가 만든 대표적인 궁중 정재인데요. 어머니 순원왕후의 마흔 살 생일을 경축하기 위해 만든 ‘춘앵전’이라는 춤으로, 버드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꾀꼬리를 노란 앵삼을 입은 무용수로 나타냈습니다. <금악>에서는 뮤지컬에 맞게 현대적인 안무가 섞였습니다.
맹인도 궁에서 일을 할 수 있다! ‘관현맹인’
성율과 임새는 부모를 잃고 홍석해의 손에서 자라게 됩니다. 홍석해는 오랫동안 장악원 전악을 맡았던 사람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홍석해와 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들 중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궁중음악 기관인 장악원에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관직과 녹봉을 주어 자립을 도왔죠. 이들을 ‘관현맹인’이라 불렀습니다.
관현맹인은 양인뿐 아니라 천인 중에서도 선발했으며, 임진왜란 이전에는 장악원에 약 20여명의 관현맹인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관현맹인들은 주로 내명부가 여는 내연에서 악기를 연주했는데요. 내외를 엄격하게 했던 조선시대 남자 악공들이 왕대비나 왕비, 후궁 앞에서 기녀의 춤과 노래에 반주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악장등록>에 따르면 숙종 6년, 관현맹인 홍석해 등이 녹봉을 복구해달라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시기가 달라 동일인은 아니지만, <금악>의 홍석해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지 않았을까요?
뮤지컬 <금악>의 관전 포인트 3
한국의 ‘전통’ 제대로 살려냈다!
극의 배경은 조선시대, 장소는 조선의 궁궐 안에 있는 장악원입니다. 인물들은 국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지만, 장르는 뮤지컬이죠. 전통과 현대 장르의 융합은 어떨까 궁금한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양악기와 국악기가 함께 하는 32인조 오케스트라, 경기도무용단원들의 창작과 전통을 오가는 한국무용, 다양한 인물로 분한 소리꾼들이 합쳐져 제대로 된 사극의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금악>을 위해 뭉친 경기도 예술 단체들의 다양한 예술 자원도 돋보입니다. 2부의 진찬연 장면이 시작됨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피트가 올라오고,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가 제대로 된 정재 연주를 선보이는데요. 흔히 접할 수 없었던 궁중음악 라이브 연주가 극의 백미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 ‘갈’
극의 중반부에 이르러 관객은 새로운 캐릭터 ‘갈’을 만나게 됩니다. ‘갈’은 성율이 금악을 해독해 만나는 존재로, 이름처럼 욕망에 목마른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자신을 깨운 자의 욕구를 생명처럼 쓰며 힘을 발휘하죠. 사람도 아니고, 귀신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이 캐릭터를 통해 율은 과거의 비밀을 알게 되고, 자신의 욕망에 점점 삼켜지는데요.
분명 존재하지만 숨겨진 금기와 욕망을 나타내는 캐릭터, ‘갈’은 아주 매력적입니다. 국악을 전공한 추다혜와 뮤지컬 배우 윤진웅이 더블 캐스팅되어, 다른 창법과 매력을 뽐냅니다. 더 나아가 갈을 깨운 성율과 주고받는 대화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마음에 숨어있는 욕망에 대한 깊은 질문을 남깁니다.
새로운 시도와 신선한 성취, 창작 뮤지컬
거듭된 재연을 통해 완성도를 쌓아온 라이선스 뮤지컬에는 노련미가 있다면, 막 세상에 선보인 창작 뮤지컬에는 신선함이 있지요. 충분한 설득이 부족한 장면이나 무대 활용이 아쉬운 장면들도 있었지만, 훌륭한 넘버와 다양한 볼거리가 넘칩니다. 창작 뮤지컬 <금악>은 8월 18일부터 29일 약 2주간 짧게 관객을 만납니다. <금악>의 새로운 시도를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확인해보면 어떨까요.
뮤지컬 <금악禁樂>
2021. 8. 18 ~ 29
경기아트센터 대극장
공연시간 135분
만 7세 이상 관람가유주혜, 고은영, 조풍래, 황건하, 추다혜, 윤진웅, 남경주 외 다수 출연
올댓아트 변혜령 인턴
송지인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자료|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참고|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 2월 9일 을묘 4번째기사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 7월 15일 경오 3번째기사
역사 속,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문화재청 소식지
콘텐츠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