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기
항상 모두에게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늘 조신하고 얌전한 여성처럼 행동하기
19세기 영국 여성들이 늘 들어온 참 ‘뻔한’ 말들입니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만 봐도 영국 여성들이 결혼, 외모, 그리고 당시의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억압을 받아 왔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죠.
지난 6월에 개막한 뮤지컬 <레드북>은 여성들이 살아가기엔 터무니없이 좁고 차가웠던 시대에 등장한 여성들만의 문학잡지 ‘레드북’의 반란을 그린 작품입니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작가’로 활약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안나, 그를 응원하며 마음속 진짜 이야기를 나눈 로렐라이 문학회 회원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며 조금씩 변화해 나가는 변호사 브라운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그렇다면 뮤지컬 <레드북>의 배경이 되는 보수적인 19세기 영국에는 ‘안나’와 같은 여성 작가들이 없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에도 많은 여성 작가들이 맹활약하며 도전과 좌절 끝에 영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는데요.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영국은 물론 전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로 문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브론테 자매가 대표적이죠. 오늘은 뮤지컬 <레드북> 속 안나처럼 편견과 차별을 이겨내고 작가로 성장했던 실제 ‘안나’들의 이야기를 알아볼까 합니다.
여성 작가에게 필명은 필수?
뮤지컬 <레드북>에서 안나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내걸고 소설을 써 잡지에 발간합니다. 안나의 소설은 지금까진 볼 수 없었던 여성들의 솔직하고도 야한 이야기로 비밀리에 남녀노소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었죠. 하지만 이를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도 많았던 바, 결국 안나에게 앙심을 품은 평론가 존슨의 선동으로 인해 법적 공방까지 이어집니다. 이때 안나의 죄목을 하나하나 나열하던 검사의 대사 중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피고는 이 부끄러운 소설을 필명도 아닌 실명으로 발행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1막 후반에는 브라운과 그의 친구들이 레드북에 실린 ‘안나’라는 이름은 실명이 아닌 ‘필명’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성 작가가 이런 부끄러운 내용의 소설을 실제 자기 이름으로 낼 리가 없다는 이유였죠.
그렇다면 실제로도 당시 여성 작가들은 ‘필명’을 사용했을까요? 네,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책 대부분은 모두 처음엔 필명으로 출간됐습니다. 대표적으로 필명을 가장 많이 사용한 작가들로는 브론테 자매가 있는데요. 브론테 가문의 세 자매 샬롯, 에밀리, 그리고 앤은 각각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를 집필해 영국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은 여성 작가에게 따라붙는 고정관념을 피하기 위해 필명을 사용했죠. 샬롯(Charlotte)은 커러(Currer), 에밀리(Emily)는 엘리스(Ellis), 그리고 앤(Anne)은 액턴(Acton)이라는 필명을 사용해 소설을 출판사에 보냈으며, 직접 사비로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필명과 관련한 일화로는 샬롯 브론테와 <제인 에어> 출판 기획을 맡았던 조지 스미스와의 만남이 유명하죠. 스미스는 샬롯이 필명 ‘커러’로 주고받았던 편지를 직접 꺼내 보여주고 나서야 <제인 에어>의 저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책 출판을 도운 직원조차 <제인 에어>의 작가가 여성임을 믿지 못할 정도였으니, 당시 여성들이 왜 ‘필명’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죠.
반대로 필명을 사용했지만 ‘성별’을 숨기지는 않은 여성 작가도 있었습니다. 여전히 영국 10파운드 화폐권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오만과 편견>의 저자 제인 오스틴인데요. 그는 ‘한 여자(By a Lady)’라는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무시와 차별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이 남성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것과 비교한다면, 자신이 ‘여자’임을 뚜렷하게 밝힌 오스틴의 행보는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독특한데요. 남성 중심의 소설이 만연하던 문학계에 자신이 집필한 <오만과 편견>만큼은 여성의 관점으로 쓴 소설임을 드러낸 오스틴 나름의 작은 ‘반란’이었겠죠?
이러한 맥락에서 뮤지컬 <레드북> 속 안나가 필명이 아닌 실명을 사용한 것이 ‘파격적인’ 행보로 받아들여진 것은 당연합니다. 여성 작가가 그동안 금기시됐던 성적인 이야기를 쓴 것도 모자라 필명이 아닌 실명을 사용했으니 말이죠. 하지만 이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안나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여성들에게 용기를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 여자는 독립적이고 똑똑하면 안 되나요?
뮤지컬 속 안나의 소설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큼 큰 논란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당시의 사회적 말을 빌리자면 너무 ‘솔직하고 천박했기’ 때문이라고 하죠.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도 금기시되던 때에 자신의 이상형 ‘올빼미’를 상세하게 묘사하며 써 내려간 솔직한 ‘성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늘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여야 하는 여성들이 강인하고 독립적으로 그려진 모습은 당시의 사회적 통념으론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19세기를 살아간 여성 작가들도 이런 비판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소설 <폭풍의 언덕>이 대표적인데요. 주인공 히스클리프, 캐서린, 그리고 언쇼의 복잡 미묘한 심리와 감정이 얽히며 ‘폭풍’과도 같은 애증의 관계를 자유분방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매우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름다워야 하는 ‘사랑’이란 주제를 너무 거칠고 격정적으로 다뤄 천박하다는 평도 이어졌죠.
또 다른 브론테 자매의 소설 <제인 에어>는 독립심이 너무 강한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현실성이 결여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제인 에어는 고아지만 가정교사로 취직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합니다. 제인 에어는 그 과정에서 겪는 역경을 혼자서 헤쳐나가고, 불의 앞에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런 제인의 모습은 당시 영국이 요구한 여성상과 맞지 않았죠. 고난 앞에 낙담하거나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제가 인형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요? 감정도 없는 기계라고 생각하나요?”와 같은 대사를 던지는 모습은 여러 평론가들에게 불쾌감을 줬다고 합니다.
<레드북> 속 안나의 소설은 법적으로는 논란이 되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큰 사랑을 받습니다. 독자들이 보낸 긍정적인 후기는 법정에서도 유리한 결과로 이어졌죠. 이후 안나는 계속해서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브라운과의 즐겁고 자유로운 연애생활을 토대로 소설을 쓰죠.
실제 <제인 에어> 또한 이와 비슷했습니다. 비록 여러 비평가들의 혹평이 쏟아졌지만, 소설은 단번에 인기를 끌며 큰 성공을 얻었습니다. 또한 이 소설로 인해 샬롯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들죠. 반면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 <폭풍의 언덕>을 집필하고 요절한 에밀리는 살아생전 그 어떤 영광과 성공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소설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연극과 영화 등으로 리메이크되며 그 작품성을 입증받았죠.
로렐라이 언덕 문학회, 여성들의 연대!
뮤지컬 <레드북>에는 마음 따뜻해지는 다양한 관계가 등장합니다.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브라운은 안나와의 사랑을 통해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되죠.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는 노부인 바이올렛은 안나가 들려주는 ‘야한 이야기’를 통해 삶의 활력소를 얻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관객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로렐라이 문학회의 여성들입니다. 이들은 각자의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며 서로에게 위로와 지지를 보내죠.
빅토리아 시대엔 여성들의 문학 활동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여성의 이야기는 대부분 남성의 언어와 시선을 통해 그려지고 있었죠.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도 있는데요. 1843년, 자신의 시를 비평가 로버트 사우디에게 보낸 샬롯 브론테는 이런 답신을 받았습니다.
문학은 여자의 일이 될 수 없으며,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자가 자신에게 부과되는 의무에 헌신하자면 재능을 발휘한다거나 여흥 삼아서라도 문학 활동을 할 여유를 갖기는 힘들 것입니다.
뮤지컬 <레드북>에서 로렐라이 언덕 문학회의 잡지 또한 여성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번 출판을 거절당합니다. 때문에 이들은 직접 ‘레드북’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길거리에서 판매를 하죠. 실제로 19세기엔 인쇄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여러 종류의 잡지들이 등장했고, 여성들이 자비로 출판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소설 외에도 시를 즐겨 쓴 브론테 자매들 또한 자신들의 시를 모아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는데요.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하자 이들은 결국 자비 출판을 통해 시집을 완성했죠.
이렇듯 여성의 문학적 진출이 매우 힘들었던 당시, 여성 작가들은 뮤지컬 <레드북> 속 로렐라이 문학회 회원들처럼 마음과 뜻을 모아 자신들만의 ‘문학 클럽’을 만들며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책을 접할 기회가 현저하게 적었던 노동자 계층의 여성들에게도 문학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문학을 평범한 일상의 탈출구로 여긴 이들은 서로의 감상평을 나누고 책의 결말을 상상해 직접 써 내려가는 문학회를 개설해 운영해 나갔죠. 여성들은 자신이 읽은 소설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만의 단단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나아가 이 연결고리는 사회적 이슈인 교육, 노동, 남녀 불평등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으로도 이어졌는데요.
대표적인 예로는 빅토리아 시대의 또 다른 인기 여성 작가 메리 엘리자벳 브랜든(Mary Elizabeth Braddon)의 센세이션 소설 <오들리 부인의 비밀(Lady Audley ‘s Secret)>이 있습니다. 해당 소설은 전통적인 여성상을 벗어난 오들리 부인이 벌이는 살인과 간통 등의 이야기로 당시 독자들에게 많은 충격을 선사한 작품인데요. ‘남편의 아내’라는 지위를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사는 오들리의 ‘반사회적인’ 모습에 여러 여성들이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와 권위에 대한 의문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의문을 갖고 모인 여성들이 모여 문학회를 개설했고 이는 자연스레 여성의 인권에 대한 활발한 토론으로 이어졌죠. 많은 영문학 학자들은 여성 문학회의 토론과 연대가 이후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뮤지컬 <레드북>
2021.6.8 ~ 2021.8.22
(코로나19로 인해 7.6 ~ 7.17 공연 중단)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공연 시간 165분
만 13세(중학생) 이상 관람가차지연 아이비 김세정 송원근 서경수 김인성 홍우진 정상윤 조풍래 방진의 김국희 원종환 김대종 안창용 김승용 허순미 김연진 이다정 박세훈 이경윤 김지훈 강동우 김혜미 출연
올댓아트 강나윤 인턴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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