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 일상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가 음악 같다고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19세기 미국 뉴욕에는 이런 자연의 소리를 악보에 기보한 최초의 음악가가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시미언 피즈 체니. 성공회 사제였던 그는 사제관 정원에서 들리는 자연의 소리를 기보해 <야생 숲의 노트>라는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그에게 기보는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표현이었죠.
그의 인생과 음악을 담은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전 세계 최초로 무대화됩니다. 평생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음악에 헌신한 시미언 역은 배우 정동환이 연기합니다. 시미언의 딸 로즈먼드와 아내 에바는 배우 이경미가 1인 2역으로 연기하고요. 여기에 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오는 배우 김소진이 내레이터로 출연해 시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를 들려줄 예정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실험적 작품을 선보이는 세종문화회관의 ‘컨템포러리S’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된 공연이기도 한데요. 이번 작품의 실험 주제는 ‘소리’였습니다. 시미언이 일생을 바쳐 기록한 소리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소리를 통해 우리는 어떤 감동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연출을 맡은 오경택 연출가와 각색을 담당한 황정은 작가를 만나 들어보았습니다.
파스칼 키냐르의 동명 희곡이 원작입니다. 작품에 대한 첫인상이 어떠셨나요?
황정은: 작가가 독자를 매혹시킬 의도가 전혀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관객을 설득하려는 마음도 없고, 자기가 쓰고 싶은 걸 쓴 것 같았죠. 이런 작품은 흔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어요.
오경택: 형식적으로는 희곡인데 실제 상연을 하기는 까다로운 작품이었어요. 교과서에서나 봤던 레제드라마(Lesedrama), 즉 읽기 위한 희곡이라고 할까요. 독자로서는 흥미로워요. 상상의 여지가 많거든요. 하지만 연출가로서는 이걸 무대화해서 관객들과 소통해야 하니 고민이 많았죠. 한편으로는 작품의 불친절함이 매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떤 점이 상연을 하기 까다롭다고 느껴졌나요?
오경택: 인물의 행동이 관객 입장에서 설득력과 당위성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어요. 눈에 보이는 특별한 사건보다는 은유와 상징으로 구성된 작품이에요. 그래서 관객 입장에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저 사람은 왜 저래?” 하게 되는 거죠. 연극은 본질적으로 배우의 예술이고, 관객들은 배우의 행위에서 코드를 읽어나가야 하는데, 이 작품엔 사실적인 코드가 많지 않아요. 쉽진 않지만 배우들과 그 비밀들을 파헤쳐 나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해당 희곡이 무대화되는 건 이번 공연이 처음인데요. 연출의 주안점은 무엇이었나요?
오경택: 주인공부터가 새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를 음악으로 만든 인물이잖아요. 그래서 ‘소리’라는 요소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공연엔 크게 다섯 종류의 소리가 나와요. 자연의 소리, 시미언이 <야생 숲의 노트>에 기록한 소리, 그걸 바탕으로 이진욱 작곡가가 창작한 곡들, 작가가 제시한 실제 작곡가의 곡들, 그리고 배우의 몸을 통해 발화되는 음성들. 이런 다양한 소리의 층위를 다채롭게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이머시브 사운드 효과’를 사용한다고요.
오경택: 60여 개의 스피커가 관객의 앞뒤, 양옆, 그리고 머리 위에 설치됩니다. 그렇다고 ‘화려하게 펼쳐지는 사운드의 향연’ 같은 것은 아니고요. (웃음) 관객이 실제로 이 정원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새소리가 음악이 되고, 음악이 다시 새소리가 되는 순간을 섬세하게 표현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음악적 실험이에요.
연극인 동시에 현대음악 프로젝트 같기도 하네요.
오경택: 그래서 이 작품을 위한 새로운 장르 이름을 만들어볼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괜히 규정지으면 선입견이 생길 것 같아 그만뒀죠. 컨템포러리S 프로그램을 통해 색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어 반갑더라고요. 다양성을 위해 공공극장에서 이런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많이 추진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동환, 김소진, 이경미 세 배우가 출연하는데요. 이 작품을 통해 세 배우의 어떤 매력을 볼 수 있을까요?
오경택: 정동환 선생님은 지금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많이 하셨어요. 이 작품 또한 인물을 구현하기 쉽지 않은데, 도전 정신을 갖고 긍정적으로 임하고 계십니다. 김소진 배우는 상상력과 몰입도가 좋은 배우예요. 시미언과 로즈먼드는 살아있는 인물이라 접근하기 비교적 수월한 반면, 내레이터는 캐릭터성이 없고 언어만 주어졌거든요. 그 언어를 어떻게 발화할지, 차분하게 잘 찾아가는 중입니다. 이경미 배우는 가진 게 많은 배우예요. 로즈먼드는 젊은 시절부터 50대까지 표현해야 하고, 엄마인 에바도 1인 2역으로 연기해야 하거든요. 쾌활함과 밝음부터 성숙함과 어두움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갖춰야 하는 역할인데, 이경미 배우는 좋은 조건을 갖췄죠. 그리고 세 배우의 음색이 다양하고 매력적이에요. 정동환 선생님은 굵고 중후하다면 김소진 배우는 차분하고 단아하죠. 이경미 배우는 파워풀하기도 하고 묘하게 애잔한 슬픔이 묻어나는 톤도 있어요. 이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소리가 굉장히 듣기 좋아요.
주인공인 시미언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에요.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딸을 집에서 내보내고 기보에만 몰두하는데요. 이런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오경택: 시미언이 <야생 숲의 노트>에 기록한 새소리를 보면 대부분 불협화음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의 소리는 마냥 아름다울 것 같은데, 시미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는 딸이 태어나던 날 아내를 잃었어요. 아내가 죽어가며 냈던 고통의 소리와 아이가 태어나는 울음소리를 동시에 들었던 그의 귀에는 세상 모든 소리가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딸의 탄생 때문에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딸을 사랑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대본에도 ‘아내가 떠나던 날 하나님은 떠났다’는 대사가 나와요. 본인이 사제인데도요. 크게 공감이 가거나 응원해 주고 싶은 인물은 아니죠. 그런데 정동환 선생님이 설득력 있게 표현해 주고 계세요.
황정은: 제게 가장 중요했던 점은 시미언이 계속 꿈을 꾸는 인물이라는 거예요. 노년에도 소리를 기보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죠. 원하는 걸 죽을 때까지 추구했다는 점에서 닮고 싶은 인물이기도 해요.
김소진 배우가 맡은 ‘내레이터’는 어떤 역할인가요?
황정은: 원작에는 내레이터가 어떤 존재라고 규정되어 있지 않아요. 다만 제가 각색할 때 생각한 것은, 내레이터가 시미언이 듣는 모든 소리인 동시에, 시미언의 모든 역사의 소리를 들어온 존재라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보한다는 행위가 어쩌면 굉장히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거잖아요. 그 시간이 시미언과 내레이터의 대화를 통해 표현된다고 생각했어요. 시미언의 현실이 딸 로즈먼드와의 대화를 통해 표현된다면, 시미언이 살고 있는 세계는 내레이터의 말을 통해 표현되는 거죠.
오경택: 기능적 측면에서 보자면 내레이터는 작품의 난해함을 중간에서 상쇄해 주는 역할이에요. 배경과 인물을 소개해 주고 현재 상황을 해설해 주죠. 연극성을 만들어줄 수 있는 재밌는 인물입니다. 김소진 배우가 피아노 연주까지 겸할 예정이에요. 이 공간의 소리를 관장하는 지휘자 같은 역할이죠. 작품을 위해서 피아노 학원도 다녔고 음악감독의 지도도 받고 있어요.
어떤 관객들에게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를 추천하시나요?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경택: 어떤 관객이든 와주시면 감사하죠. 가장 무서운 관객은 키냐르 작가를 좋아하는 분들이에요. 마니아가 많을 텐데, 그분들이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됩니다. (웃음)
황정은: 작가를 옆에서 잘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각색했어요. 작가가 추구한 원형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죠. 어떤 관객이 이 작품을 좋아해 주실지는 저도 궁금해요. 누구에게나 말하지 못한 비밀이나 아픔이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분들이 보신다면, 극중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가실 수 있지 않을까요.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2021.6.22 ~ 2021.7.4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공연 시간 100분
만 12세 이상 관람 가능정동환, 김소진, 이경미 출연
올댓아트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사진|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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