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헤드윅>은 성전환 수술에 실패한 로커 헤드윅의 인생을 그린 작품입니다. 동독 출신의 미국 이민자이자 여자도 남자도 아닌 헤드윅은 뮤지컬 역사상 가장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 중 한 명이죠. 그런데 헤드윅만큼이나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헤드윅의 남편 이츠학인데요. 보통 여성 배우들이 연기하지만 이츠학은 설정상 남자입니다. 그는 크로아티아에서 유명한 유대계 드랙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행된 인종청소의 타깃이 될 위기에 처하자, 투어 공연 중이었던 헤드윅에게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합니다. 헤드윅은 한 가지 조건 하에 이츠학과의 결혼을 승낙합니다. 그가 더 이상 드랙 분장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죠.
언뜻 공연에서 이츠학은 헤드윅의 코러스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연을 끝까지 보고 나면 그가 <헤드윅>의 감동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걸 알게 되죠. 자신이 받았던 상처와 억압을 이츠학에게 돌려주던 헤드윅이 마침내 이츠학에게 속죄의 손길을 내밀고, 이츠학이 그토록 바라던 드랙퀸의 모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마지막 장면은 2시간 30분에 달하는 <헤드윅>의 여정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이토록 복잡한 인물들이기에 연기하는 배우마다 서로 다른 헤드윅과 이츠학을 선보여 왔는데요. 이번 2021년 공연에서는 이영미, 김려원, 제이민, 유리아 네 명의 배우가 이츠학을 연기합니다. 그중 이영미는 2005년 <헤드윅> 국내 초연부터 이츠학으로 출연해온 <헤드윅>의 산 역사입니다. 2014년 공연 이후 7년 만에 그가 이츠학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많은 <헤드윅> 팬들이 반가워했죠. 반면 김려원은 이번 <헤드윅>을 통해 처음으로 이츠학에 도전했습니다. ‘베테랑’ 이츠학과 ‘새내기’ 이츠학, 서로 다른 에너지로 <헤드윅> 무대를 빛내고 있는 두 배우의 이야기를 서면으로 들어보았습니다.
이영미
7년 만에 돌아온 ‘미츠학’을 반가워하는 팬들이 많아요. 이번 시즌 <헤드윅>으로 돌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2014년에 <헤드윅>을 마치면서 한동안은 정말 안 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제 인생도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느꼈거든요. 나이차가 많이 나는 헤드윅들과의 영혼의 접점도 좀 다르게 느껴졌고요. 하지만 ‘완전 끝이다’ 이런 생각은 안 했어요! 언젠간 또 할 것만 같았죠. 이번 시즌에 친구인 (오)만석 배우가 “나랑 함께 하자“고 했고, 두 번 생각도 안 했어요. 한다고 했습니다!
<헤드윅> 국내 초연부터 참가한 만큼 애정이 남다를 것 같아요. 이영미 배우에게 <헤드윅>과 이츠학이란?
요즘 들어 ‘내 인생에 <헤드윅>이란 무엇일까?’를 깊이 고민할 정도로 <헤드윅>은 저에게 ‘원 앤 온리’예요. 제가 20년 넘게 뮤지컬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헤드윅>과 이츠학만큼 나라는 인간의 매력을 잘 보여줄 작품이 있을까 싶어요. 저에게 캐릭터를 만들어주고 팬덤을 갖게 해주고 멋짐을 준 친구죠. 초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캐릭터예요.
초연 때와 지금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생각에 변화가 생기기도 했나요?
초연 때는 사실 노래 열심히 한 것 외엔 크게 분석조차 못 했던 것 같아요. 시즌을 거듭하면서 이츠학은 정말 조금씩 조금씩 진화하기 시작했어요. 매일 다른 생각을 했고, 다른 상황을 상상했고, 수많은 시도를 했고, 점점 헤드윅을 사랑하게 됐고, 상처를 받았고, 화가 났고, 마음이 아팠고, 인종 청소 당한 친구들과 가족들을 잊으려 노력하기도 했고, 그립기도 했고, 헤드윅이 밉기도 했어요. 지금은 헤드윅이, 내가, 우리가 많이 아프고 짠하고, 그냥 다 알겠고, 그러네요. 세월과 함께 나의 이츠학은 정말 많이 변했답니다.
헤드윅뿐만 아니라 이츠학 역시 배우 재량껏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인데요. 이영미 배우가 연기하는 이츠학은 어떤 사람인가요?
전 헤드윅도 그렇고 이츠학도 그렇고 음악 하는 사람, 로커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빛나는 로커, 무대 위의 사람, 그리고 ‘real woman(진짜 여자)’에 대한 갈급함과 목마름. 가지지 못한 슬픔과 분노가 숨겨지지 않는 인간, 그 에너지가 흘러나와 암전 속 무대 뒤에 서있어도 빛을 발하는 사람.
이츠학의 여정 중 ‘Midnight Radio’는 특히나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장면인데요. 이때 헤드윅과 관객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예전엔 내 감정에 더 집중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관객분들의 숨죽임에 집중해요. 헤드윅도 나 같고 나도 헤드윅 같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my dream, my song, 내리치던 여름 세찬 폭풍처럼 사라지는 꿈“이란 가사가 그냥 마음을 후려칩니다. 내게 자리를 내주고 뒤돌아 나가는 헤드윅을 바라보고, 나만의 무대에서 ‘손을 들어’를 외치고, 마지막 조명이 꺼진 후의 암전과 관객분들의 박수 소리…. 모든 것이 슬프고 아름답습니다.
오만석, 조승우 배우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요. 각 배우와의 호흡은 어떤가요? 다른 세 헤드윅과 호흡을 못 맞춰보는 게 아쉽지는 않은가요?
오만석은 쏘 핫! 조승우는 쏘 쿨! (웃음)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냥 다른 공연입니다. 전 둘 다 너무 좋고요. 달라서 매력적이고 지루하지 않아요. 둘 다 십수 년을 호흡 맞춰와서 말 안 해도 알겠고 웃고 떠들다가도 눈 마주치면 또 급 울컥하고 그러네요. 스스로들 ‘고인 물’이라고 지칭하며 제발 그만하자고 농담도 하고요. (웃음) (이)규형 배우, (고)은성 배우, 렌 배우 모두 매력적인 배우들이라 함께 하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해요. 다들 사이도 좋고요. 렌은 사석에서 너무 착하고 사랑스러운데요. 무대에서 ‘부부’로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웃음)
<헤드윅>은 특히나 관객과의 호흡이 중요한 공연인데요. 이번 시즌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관객과의 교류가 적어져서 아쉽지 않은가요?
아쉽죠. 정말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게 또 가능하더라고요. ‘미친 커튼콜’이 <헤드윅>의 백미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지금의 ‘Midnight Radio’에서 이어지는 가슴 떨리는 커튼콜도 여운이 한층 깊어지는 것 같아 좋습니다.
역대 <헤드윅> 공연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헤드윅>이 초연 때는 2시간, 지금은 2시간 40분, 긴 시간 동안 퇴장이 없잖아요. 계속 수분 섭취를 하다가는 정말 낭패를 보거든요. 한 번은 공연 전에 모두가 선물로 들어온 커피를 마시고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날 밴드 오빠들이 줄줄이 무대를 가로질러 자꾸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거예요. 전 다행히 그날 커피를 마시지 않았답니다. (웃음)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넘쳐나요. 헤드윅의 부츠 굽이 부러져서 급히 갈아신겨 주는데 안에 까만 양말 신은 게 창피해 발을 숨기던 (김)다현이도 생각나고요. 토마토가 의도치 않은 곳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하고요. (웃음)
이츠학은 결말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츠학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기만의 무대를 찾고, 사랑과 작은 행복을 찾았기를 바라요. 야망을 좇으며 살지 않고, 자신을 인정해 주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과 때론 힘들어하기도 하고, 때론 웃으며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길. 넌 그럴 거야. 넌 똑똑하고 따뜻한 사람이니까.
김려원
이번이 첫 <헤드윅> 출연인데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요?
제작사 쇼노트의 다른 뮤지컬 <리지>에 출연했었는데, 감사하게도 <헤드윅>에도 불러 주셔서 참여하게 됐어요!
국내 공연 역사도 길고 여러 번 출연한 배우도 많은 작품이라 뉴 캐스트로 참여하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연습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부담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 같아요. 당연히 부담감이 있었고요. <헤드윅>은 어떤 배우가 하느냐에 따라 다 달라서 대본이나 악보가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아요. 그래서 초반에는 어떤 것이 기준이고, 어떤 부분에서 변화가 허용되는지를 알기가 어려워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연습하면서 다른 이츠학 배우들에게 도움을 받은 부분도 있나요?
다른 이츠학 배우님들은 최소 세 번째 참여라 사실은 많이 연습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데 저만 연습하는 시간에도 제이민 배우가 몇 번이나 시간을 내서 도와주러 와줘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평소 걱정 많은 제 성격을 알아서 돕지 않을 수가 없었대요. 당연히 (유)리아나 영미 언니에게도 많이 도움을 받았는데, 캐릭터와 관련해서는 영미 언니가 해주신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이츠학은 어느 때는 헤드윅을 미워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고 안쓰러워할 수도, 싫어할 수도, 관심 없을 수도, 그야말로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 이야기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이츠학 분장을 한 스스로를 처음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수염, 그리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짧은 머리가 많이 어색했어요. 그리고 드레스 리허설 사진을 봤을 땐 정말 깜짝 놀랐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제가 기억하는 아빠의 얼굴이 저에게서 고스란히 보이더라고요! 집에 와서 동생이랑 엄마에게도 사진을 보여주며 한참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참 신기했어요!
헤드윅뿐만 아니라 이츠학 역시 배우 재량껏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인데요. 김려원 배우가 연기하는 이츠학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현재 겉모습은 엄청나게 화려하지만 그렇지 못한 헤드윅의 내면, 그리고 지배 당하고 상처받았던 헤드윅의 과거가 이츠학을 통해 조금이나마 보였으면 했어요. 헤드윅은 자신이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자기가 받았던 상처를 이츠학에게 그대로 대물림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최고의 드랙퀸이 되고 싶은 이츠학의 존재 가치가 ‘Midnight Radio’에서 최대한 빛날 수 있도록 앞선 장면들을 연기하고, 또 무대에 대한 꿈이 있는 캐릭터인 만큼 무대를 즐기는 모습도 잘 보여드리는 것. 그게 제가 중요시하는 이츠학의 모습이에요.
마지막 장면인 ‘Midnight Radio’은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나요?
드디어 무대 정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꿈꾸던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있을 수 있는 그 순간이 형용할 수 없이 벅차고 감사하게 느껴져요. 헤드윅에게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요.
이규형, 고은성, 렌 배우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요. 다른 두 헤드윅과 호흡을 못 맞춰보는 게 아쉽지는 않은가요?
함께 호흡을 못 해본 건 정말 아쉬운 일이에요.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시고, 그냥 숨만 쉬셔도 그 인물로 보이는 엄청난 내공의 ‘도사‘들이시니까요. 하지만 이츠학은 헤드윅이 이 콘서트를 잘 마칠 수 있도록 잘 보필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모든 헤드윅들의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손발이 착착 맞게 도와줄 수 있는 지금도 좋은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규형 오빠, 은성, 렌 모두 찰떡같이 헤드윅 그 자체인데 셋이 모두 참 다르거든요? 저도 기본적으로 제가 표현하고 싶은 드라마가 있지만, 이렇게 다른 세 사람을 만날 때 각자 다른 시너지가 나는 것 같아서 재밌고 즐거워요.
이츠학은 결말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츠학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츠학은 이제 절대 억압받지 않고, 가발도, 무대도, 노래도, 입고 싶은 예쁜 원피스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이 꿈꾸는 모습으로 잘 살았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츠학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기보다는, <헤드윅> 공연을 하면서 저 또한 무언가를 느끼고 위로받기에, 봐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이 말을 해드리고 싶어요. “여러분이 원하는 여러분의 모습으로 살아가세요. 당신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완전합니다.”
뮤지컬 <헤드윅>
2021.7.30 ~ 2021.10.31
서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공연 시간 130분
만15세 이상 관람가오만석, 조승우, 이규형, 고은성, 뉴이스트 렌, 이영미, 김려원, 제이민, 유리아 출연
올댓아트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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