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은 서양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는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특히 사랑받는 소재다. 파리스와 세 여신을 둘러싼 황금 사과 이야기부터 10년을 싸운 끝에 트로이 목마로 끝이 난 전쟁 이야기, 그리고 패전국 트로이의 여인들 이야기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까지. 트로이 전쟁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설, 영화, 공연, 게임 등의 원천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트로이 전쟁 이야기가 가진 보편성과 동시대성에 주목한 연극이 있다. 지난 6월 대학로에서 개막한 <일리아드>다. 미국에서 2010년 초연된 이 작품은 트로이 전쟁이 이후 인류사에 등장한 수많은 전쟁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처음엔 분노로 인해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그저 지금까지 들인 병력과 시간이 아까워서 멈추지 못하는 것이 전쟁이라고,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은 수많은 이름 없는 민중들이라고 말이다.
<일리아드>의 또 다른 주목할 특징은 바로 1인극이라는 점이다. ‘내레이터’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서는 배우는 약 두 시간 동안 오롯이 혼자서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헥토르, 안드로마케, 헤르메스 등 수많은 신화 속 인물들을 마치 빙의한 것처럼 연기하는가 하면, 때로는 제3자의 위치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지난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기본적인 대본 외의 거의 모든 것이 배우 재량에 달렸다는 것이다. 내레이터를 연기하는 황석정, 최재웅, 김종구 세 배우는 콘셉트부터 제각각이다. 황석정의 내레이터는 신기를 가진 사제 내지는 타로술사를, 최재웅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홈리스를, 김종구는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년병을 연상시킨다. 이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악기 연주자, 일명 ‘뮤즈’ 또한 배우별로 다른 악기를 연주한다. 이러한 매력 덕에 전 캐스트를 모두 관람하는 관객들도 적지 않다. <일리아드>의 세 배우는 어떤 마음으로 내레이터를 연기하고 있을까. 서면 인터뷰를 통해 들어 보았다.
배우 황석정
<일리아드>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작품의 어떤 점에 흥미나 매력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작사 대표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셨습니다. 대본을 다 읽고 왜 제게 연락을 주셨냐고 물어보니, 처음부터 절 생각했다는 말을 해주셨고, 그게 너무 감사했어요. 지금은 다양한 매체에서 연기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연극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라, 이제 다시 연극을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또 고대 역사나 신화, 평화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요.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목적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극 중 이름 없이 죽어가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아픔을 이야기할 때, 제 삶의 목적도 충족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연습 과정에서 가장 힘들거나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이런 극을 다뤄본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방향을 찾아가는 작업이 오래 걸렸어요. 그리고 서양적인 시각과 어미를 가진 작품이기에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소통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황석정 배우가 연기하는 내레이터는 어떤 존재인가요?
제가 연기하는 내레이터는 인간의 운명과 숙명을 항상 고민하고 다루는 ‘타로술사’입니다. 타로에 신화적인 요소, 운명적인 요소들이 있잖아요. 제가 이 작품을 만난 것 역시 운명적인 느낌이 있고요. 그런 면에서 타로술사라는 콘셉트가 저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내레이터와 뮤즈는 어떤 관계인가요? 여러 악기 중 기타와 호흡을 맞추게 된 이유도 궁금합니다.
말 그대로 ‘뮤즈’예요. 제게 더 큰 영감을 주는 어떤 존재입니다. 기타와 호흡을 맞추게 된 이유는 음악감독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내레이터가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미리 무대에 오르고, 관객이 퇴장한 뒤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는 연출이 독특해요. 이때 어떤 생각을 하면서 무대에 서 계시나요?
들어오는 관객들을 봅니다. 이들이 어떤 상태인지, 누구인지, 어떤 고통이 있는지, 희망이 있는지 느끼려고 애쓰고 있어요. 제가 앞으로 할 이야기를 그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공감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연이 끝나는 순간에는 이야기를 들어준 이들에 대한 감사함과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잘 가지고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대에 서 있습니다.
기원전 이야기인 <일리아드>가 지금 다시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주 오래전’으로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우리와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연극 <일리아드>를 본 분들이 내레이터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들 또한 내레이터가 되길 바랍니다.
이번 <일리아드>는 배우로서 큰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또 도전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을까요?
‘사랑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극을 해보고 싶습니다.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부각되는 작품이 많은데, 꼭 그런 게 아니라도 어떤 게 진짜 사랑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아마도 ‘사랑’이야말로 인류를 치유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우 최재웅
<일리아드>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작품의 어떤 점에 흥미나 매력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1인극이라는 설정과 요즘 쉽게 볼 수 없는 소재를 다룬 이야기라 흥미를 느끼고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최재웅 배우가 연기하는 내레이터는 어떤 존재인가요?
내레이터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입니다. 관중들이 있든 없든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인물, 그리고 관객들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게끔 하는 인물입니다.
지금의 내레이터 콘셉트는 어떻게 정해졌나요?
원래 대본 상의 설정은 ‘시인’입니다만, 아무래도 서양의 이야기이고 신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보니 좀 더 친절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 경우에는 이 이야기를 할 만한 인물, 현실적인 인물이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연출님과 상의 후 ‘홈리스’라는 인물로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내레이터와 뮤즈는 어떤 관계인가요? 여러 악기 중 퍼커션과 호흡을 맞추게 된 이유도 궁금합니다.
뮤즈 역을 맡으신 장재효 선생님께서 정말 큰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내레이터와 뮤즈는 그냥 ‘동반자’라고 생각하시면 쉬울 것 같습니다. 내레이터는 이야기로써 노래하고, 뮤즈는 음악으로써 노래합니다. 제 경우에는 아무래도 1인극이기 때문에 대사의 리듬에 많은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때문에 리듬 악기인 타악기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레이터가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미리 무대에 오르고, 관객이 퇴장한 뒤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는 연출이 독특해요. 이때 어떤 생각을 하면서 무대에 서 계시나요?
대사의 양이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미리 무대에 나와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속으로 대사를 곱씹고 있습니다.
기원전 이야기인 <일리아드>가 지금 다시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굳이 이 작품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들 느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옛날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번 <일리아드>는 배우로서 큰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또 도전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을까요?
맞아요. 정말 큰 도전이었는데, 그 도전에 대한 보람을 나름 느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늘 새로운 것, 안 해 본 것들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새롭고 참신한 작품,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습니다.
배우 김종구
<일리아드>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작품의 어떤 점에 흥미나 매력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대본을 3년 전에 처음 읽어봤는데, 사실 두려운 마음이 컸어요. 너무 방대한 대사량과 어려운 문어체로 표현된 대사들…. 1인극이라고 하는데, 만약 이 작품을 하게 된다면 ‘과연 내가 오롯이 혼자 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앞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인생에서 시도해 볼 만한, 그리고 그동안 배우로서 해보지 못했던 작품이라 용기를 냈습니다.
연습 과정에서 가장 힘들거나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원작 대본은 데니스 오헤어라는 유명하고 연기도 잘하는 배우에게 맞춰진 대본이었어요. 그런 대본을 김종구라는 배우에게 맞는 대본으로 만들기까지 과정이 녹록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특징을 잡고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쏟았던 것 같습니다.
김종구 배우가 연기하는 내레이터는 어떤 존재인가요?
원작에선 ‘시인’으로 표현되지만, 저희는 조금 다르게 어떤 공간에 ‘갇혀 있는’ 존재라고 설정했어요. 전쟁이 존재하는 한, 전쟁과 연관된 모든 공간에 갇혀 있는 존재예요. 그곳에 온 사람들에게 전쟁과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전쟁으로 죽어간 이름 없는 사람들의 영혼이 깃든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중에서 저는 한 소년병의 영혼이 내레이터에게 깃들어 표현되길 바랐습니다. 내레이터는 매번 이 노래가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해요.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매번 노래할 수밖에 없는 내레이터의 감정을 객석에서 잘 느끼고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내레이터와 뮤즈는 어떤 관계인가요? 여러 악기 중 하프와 호흡을 맞추게 된 이유도 궁금합니다.
저와 뮤즈는 수많은 전쟁을 함께 경험했던 존재입니다. 내레이터가 노래하기 싫을 때에도 뮤즈가 노래하라고 한다면 노래를 하는 그런 관계죠. 하프와 호흡을 맞추게 된 건 음악감독님의 선택이기도 했고요. 개인적으로는 하프라는 악기가 고대부터 현재까지 시대를 초월하면서 그리스 시대의 느낌을 표현하기 적합한 악기라고 생각했어요. 작품 후반부에 하프로 ‘릴리 마를렌’이라는 곡의 선율이 흘러나오는데, 그 음악이 처음 하프로 울려 퍼졌을 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더라고요.
내레이터가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미리 무대에 오르고, 관객이 퇴장한 뒤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는 연출이 독특해요. 이때 어떤 생각을 하면서 무대에 서 계시나요?
매번 이 이야기가 정말 마지막이었으면 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서 있습니다.
기원전 이야기인 <일리아드>가 지금 다시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작품 안에서 이야기되는 모든 전쟁들이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교육받지 못하고, 인권이 유린되고, 사람들의 분노 또한 계속되고…. 매번 이 노래가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노래하지만, 분노를 내려놓지 못하면 마지막이 되지 않겠죠. 극 중 나오는 ‘릴리 마를렌’이라는 곡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이 노래는 세계대전 당시 이념과 진영에 관계없이 사랑받았던 노래예요. 전쟁 당시 스피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전쟁을 잠시 멈추기도 하고, 이 노래를 부르다 보면 반대 진영에서 뒷부분을 이어 부르기도 했대요. 평화에 대한 상징성을 가진 곡이에요. 이 곡을 통해 내레이터가 하려는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이번 <일리아드>는 배우로서 큰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또 도전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을까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최루성 멜로드라마’가 하고 싶어요. 영화 <약속>, <편지>, <너는 내 운명>처럼 자기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는 그런 절절한 멜로드라마요. 보다 보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그런 작품이 하고 싶습니다.
연극 <일리아드>
2021.6.29 ~ 2021.9.5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2관
공연 시간 100분
만 13세 이상 관람가황석정, 최재웅, 김종구 출연
올댓아트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사진|더웨이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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