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천변카바레> 배우 황석정 인터뷰
작년 50세의 나이에 피트니스 대회에 도전해 화제를 모았던 배우 황석정. 그가 올해에는 연극·뮤지컬 무대에서 도전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9월 폐막한 연극 <일리아드>에 이어 11월 개막하는 뮤지컬 <천변카바레>까지, 연달아 1인극에 출연하는 것인데요.
뮤지컬 <천변카바레>는 가수 배호의 노래들로 만들어진 트리뷰트 뮤지컬입니다. 배호는 1960년대에 활동하며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등의 히트곡을 남긴 가수입니다.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애달프고 절절한 노래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만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죠.
<천변카바레>의 주인공은 그런 배호를 동경하는 시골 청년 ‘춘식’입니다. 1960년대 서울, 상경한 춘식이 공장과 웨이터 생활 끝에 배호의 모창 가수가 되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리는데요. 원래는 여러 명의 배우가 출연했던 이 공연이 이번 시즌에는 1인극으로 각색되어 새롭게 올라옵니다. 배호와 춘식을 비롯해 순심, 미미, 음반사 사장 등 여러 배역을 모두 황석정 혼자 연기하는 것이죠.
두 작품 연속 1인극에 도전하는 황석정은 무대에 서기 전 “몸이 떨릴 만큼 두려웠다”고 말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변카바레> 무대에 도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연 연습으로 한창 바쁜 황석정을 만나 들어보았습니다.
<천변카바레>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요?
원래 이 제작사랑 <천변살롱>이란 작품을 같이 했어요. 두 작품이 같은 ‘천변 시리즈’예요. <천변살롱>은 1930년대 배경이고 <천변카바레>는 1960~1970년대 배경이죠. <천변살롱> 지방 공연 갔을 때 연출님이 <천변카바레> 주인공으로 저를 생각하셨대요. ‘아, 희한하다. 남자 역인데 왜 날 생각하셨을까’ 하고 여쭤봤더니, 제 노래에 옛날 사람들이 가졌던 구성진 회한이 있대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으면 하고 싶다고 했어요.
가수 배호의 곡으로 만들어진 트리뷰트 뮤지컬인데요. 배호의 음악을 원래 좋아하셨나요?
우리 아버지가 배호를 되게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우리 집안과 공통점이 많아요. 우리 집이 피난민이었다가 부산에 정착한 케이스였는데, 배호 선생님도 부산에 사신 적이 있어요. 그 사연도 가슴이 아파요. 선생님의 아버님이 독립군이셨는데,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목숨 바쳐 지켜낸 나라가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술을 계속 드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러고 나서 배호 선생님과 어머님은 부산의 모자원이라고, 과부들을 돌봐주는 데서 사신 거죠. 그리고 배호 선생님이 원래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셨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도 밴드에서 트롬본을 연주하셨거든요. 이런 이유 때문인지 배호 선생님에게 이상하게 마음이 가요. 마치 먼 친척처럼.
이 작품을 하기 전에도 배호의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나요?
파고다 공원에서 작은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야외에 피아노 한 대 놓고 배호 노래를 불렀어요. 할아버지들이 ‘젊은 애가 그걸 어떻게 부르냐. 아무나 못 부른다.’ 하셨는데, 노래를 시작하니 우시더라고요. 그때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이 노래가 이렇게 큰 파급력이 있구나,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그 시절로 되돌려놓는 힘을 가졌구나 싶었죠. 이날의 공연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이번 작품은 제게 운명처럼 다가왔어요. 당연히 해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어요. <천변살롱>을 7년 동안 완성했듯이, 이 공연도 길게 보며 계속 해나가고 싶어요.
<천변카바레>에는 배호의 노래를 비롯해 1960~1970년대 히트곡들을 나옵니다. 이 노래들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 작품인가요?
당시 시대 상황이 전쟁이 끝나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청년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던 때예요. 공장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힘들게 노동하던 시절이었죠. 그분들에게 당시 배호의 노래가 엄청나게 심금을 울린 거예요. 요즘 우리가 들으면 징그럽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설움을 토해내는 노래거든요. 그분들의 애환을 대신 표현해 줬기 때문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죠.
<천변카바레>의 주인공은 배호의 노래를 너무 좋아하는 한 인물이에요. 서울에 올라와서 공장을 다니다가 열악한 상황 때문에 나오고, 웨이터를 하다가 배호 모창 가수가 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배신도 당하고 스스로 배신을 하기도 하죠. 이걸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깨달아가는 이야기예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내가 누구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란 생각들을 다들 하고 있잖아요. 배호 노래를 통해 이런 게 좀 채워지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은 BTS가 큰 위로를 주잖아요. 저는 이 시대에 이 작품을 통해 배호 님을 다시금 소환해 보고 싶어요.
지난 9월 폐막한 <일리아드>에 이어 <천변카바레>까지 연달아 1인극에 출연하고 계신데요.
저는 1인극인지 몰랐어요. (웃음) 지난 공연까지는 여러 명이 출연하는 버전이었거든요. 그런데 올해 11월 7일이 배호 님이 타계하신 지 50년 되는 날이에요. 그래서 이 기간에 공연을 올리려고 하셨대요. 저는 기간도 짧으니까 <일리아드> 끝나고 합류해 보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대본을 받아보니까 1인극으로 바뀌어있는 거예요.
1인극은 힘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보람이나 매력도 클 것 같아요.
저는 1인극에 대한 욕심이 없었어요. 원래 배역도 잠깐 나왔다가 열심히 하고 집에 가서 쉬는 걸 좋아하거든요. (웃음) 그런데 <일리아드>를 했던 건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모험심 때문이었어요. 힘들긴 정말 힘들어요. <일리아드> 끝났을 때 자려고 누우면 대사들이 환청으로 들릴 정도였어요. 그런데 1인극을 하다 보면 ‘잘 끌고 왔다’는 안도감이 굉장히 커요. 예술보다는 마라톤을 한 느낌이 강하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책임지고 힘을 분배하며 해나가는 것, 그게 매력인 것 같아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을 때 스스로에 대한 기쁨을 느끼는 거죠.
그만큼 1인극을 하는 동안에는 체력 관리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밥을 엄청 많이 먹어요. (웃음) <일리아드> 때는 무대 올라가기 전부터 몸이 막 떨려요.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몸이 겁을 내는 거예요. 원래 이렇게 많이 안 먹는데, 1인극 할 땐 안 먹을 수가 없어요.
<일리아드>도 <천변카바레>도 원래는 남성 배우들이 연기했던 작품을 젠더프리로 연기하는 건데요. 어떻게 접근하고 계시나요.
<일리아드>는 원래 남자의 언어로 쓰인 작품이었기 때문에, 여자로서 풀어가기 힘든 부분이 많았어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보니,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더라고요. 각 인물이 겪은 것, 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물론 남자 역할이기 때문에 신체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긴 했어요. 나머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죠. 오히려 남자인 척하면 더 어색하거든요. 관객들도 크게 어색해하진 않으시더라고요. 관객들은 ‘와, 진짜 남자 같다’ 하려고 오는 게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교감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요.
올해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부터 <일리아드>, <천변카바레>까지 바쁜 무대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스스로 돌아본 2021년은 어떤 한 해였나요?
내 인생에서 아마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힘든 해였던 것 같아요. 코로나19가 이렇게 장기화될 줄 몰랐고, 어머니도 편찮으시고, 책임감과 불안감이 너무 컸어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연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잖아요. 그래서 몸도 되게 힘들었어요. 그 와중에 절 지켜준 게 연극이에요. 집중을 해야 하니까 힘든 걸 잊을 수가 있었어요. 무대에 서서 관객들과 만나고 호응을 받을 때 느꼈던 것들이 살아갈 힘을 준 것 같아요. 공연을 다시 하게 된 것이 참 고마운 일이었죠.
특히 <베르나르다 알바>와 <일리아드>는 마니아층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작품인데요.
제가 <일리아드>를 하겠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대학로에서 공연하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한동안 대학로에서 공연을 안 했는데, 그동안 완전히 판이 바뀌어있는 거예요. 옛날에 대학로 돌아다니면 다 아는 동료고 식구였는데, 이제는 아는 사람이 없어요. 아픈 기억이 많아서 대학로를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문득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일리아드>로 무작정 모험을 한 거예요.
그런데 이 공연을 같이 했던 배우들이 다행히 팬덤이 큰 배우들이에요. 그분들이 제 공연도 봐주시면서 흥미를 가져주신 거죠. 사실 이 공연 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아는 사람들을 초대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매일 알지도 못하는 분들이 절 보러 오시는 거예요. 그분들은 제가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걸 본 적도 없으실 텐데. 너무 신기하고 매 순간이 기적 같았어요. 하나라도 허투루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죠. <천변카바레>도 그렇고 <일리아드>도 앞으로 계속 할 것 같아요. 그동안 체력을 키워 놔야지.
다른 공연에 대한 계획도 있나요?
제 동기 두 명하고 극단 ‘햇’을 만들었어요. 작년부터 낭독공연을 일 년에 하나씩 하고 있는데, 내년에 대학로에서 한 편을 공연할 것 같아요. 그 외에도 다른 작품들을 개발하고 있어요. 아주 파격적인 작품이 될 거예요. 대학로에서 재밌는 공연들을 많이 해서 관객들이 즐겁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게끔 하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작품 창작까지 하시다니, 관심사가 정말 다양하신 것 같아요.
취미가 건설적이에요. (웃음) 다 잘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임업후계자도 따고 싶고 농기계 자격증도 따고 싶고, 그림도 마저 그려야 할 게 많고, 운동도 다시 하고 싶고. 집 짓기도 배우고 싶고 캠핑카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런데 배우를 하니까 쉽지가 않죠.
마지막으로 <천변카바레>를 보러 올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위로를 받으실 거예요. 배호 님의 노래가 굉장히 강렬해요. 이분이 너무나 힘들게 사셨거든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많은 곡들이 다 병상에서 녹음하신 거예요. 그 슬픔, 그 혼이 곡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았나 싶어요. 관객분들도 그걸 느끼시면 좋겠고요. 배호 님이 돌아가신 지 50년 되는 날에 공연이 끝나거든요. 배호 님에게 바치는 공연이라고 생각하며 하고 있어요. 제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해내고 싶어요.
뮤지컬 <천변카바레>
2021.11.4 ~ 2021.11.7
서울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화암홀
공연 시간 90분
14세 이상 관람 가능황석정, 밴드 소울트레인 출연
올댓아트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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