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뮤지컬 <드라큘라>의 캐스팅이 공개됐을 때, 뮤지컬 팬들은 오랜만에 보는 이름에 반가움으로 술렁였다. 뮤지컬 배우 겸 가수 선민이 무려 8년 만에 무대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선민은 2006년 일본에서 가수로 먼저 데뷔했다. 한일을 오가며 활동하던 선민은 2010년 <지킬앤하이드>의 루시 역에 덜컥 발탁되며 뮤지컬계에 처음 발을 디뎠다. 뮤지컬 경험이 전혀 없던 신예가 루시 역에 캐스팅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데뷔작부터 주목받은 그는 허스키한 음색과 안정적인 가창력으로 호평을 이끌어냈다. 당시 한국 나이로 스물네 살, ‘애기 루시’라는 애칭도 얻으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주목받는 신예였던 선민은 2013년 <지킬앤하이드> 재공연과 창작 뮤지컬 <아르센 루팡>을 마지막으로 돌연 무대를 떠났다. 사촌 언니를 만나러 캐나다에 놀러 갔다가 캐나다의 매력에 흠뻑 빠져 그곳에서 살게 됐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의 시간을 ‘자신과 친해지는 시간’으로 삼았던 선민. 더 깊어진 내면과 여유를 갖고 돌아온 그는 지금 복귀작인 <드라큘라>에서 루시 역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드라큘라>가 공연 중인 블루스퀘어에서 선민을 만나 무대에 돌아온 소감을 물었다.
8년 만에 뮤지컬 무대에 복귀했어요. <드라큘라>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전에 <지킬앤하이드>를 같이 했던 오디컴퍼니와의 인연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작년에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돌아온 후에 오디에 계신 분들이랑 연락을 했는데, 감사하게도 제안을 해주셨죠.
예전 공연 영상에 보고 싶다는 댓글이 최근까지도 정말 많이 달렸던데요. 알고 있었나요?
작년에 한국에 와서 오랜만에 영상을 봤어요. 그런 댓글이 많아서 신기했죠.
오랜만에 뮤지컬 무대에 선 소감은 어떤가요? 간만의 무대인데 코로나 시국이라 아쉽지는 않은가요?
주변에서도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저는 전혀 아쉽게 생각하지 않아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올리는 곳이 전 세계적으로도 많이 없잖아요.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해요.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 팀끼리 돈독해질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요. 8년 만에 무대에 선 소감은, 의외로 긴장이 안 됐다는 거예요. 그동안 나이를 먹고 성숙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뮤지컬 데뷔 무대 때는 긴장을 많이 했었나요?
그땐 많이 떨렸어요. 지인들이 보러오면 의식해서 더 떨리기도 했고요. 지금은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데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이 많이 해소됐어요.
가수, 뮤지컬 모두 데뷔 스토리가 독특해요. 가수로는 일본에서 먼저 데뷔했고, 뮤지컬은 김선영 배우의 추천을 받아 오디션을 봤다고요.
당시 모든 장르에서 ‘일본 붐’이 일었어요. 그래서 한국 회사와 계약했지만 일본에서 먼저 데뷔하게 됐죠. 뮤지컬은 김선영 선배님이 제 고등학생 때 노래 선생님이셨어요. 선배님이 너무 좋아서 계속 연락을 이어나가고 있다가, 오랜만에 만나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디컴퍼니에서 선배님한테 전화가 걸려온 거예요. <지킬앤하이드>의 루시 역 오디션을 보고 있다고요. 선배님이 전화를 끊고 나서는 저에게 “야, 너 오디션 봐라.” 이렇게 됐죠. (웃음)
고등학생 때는 가수 지망생이었는데 뮤지컬 배우에게 레슨을 받은 것도 신기하네요.
신인개발팀에서 예전에 선영 선배님한테 연습생들을 보냈는데 결과가 좋았대요. 그래서 저도 보낸 거죠. 저는 첫날부터 선생님이 정말 좋았어요. 보통 레슨을 받으면 테크닉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데, 선영 선생님은 ‘어떤 음이나 목소리를 낼 때는 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배우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게 정말 신선하고 놀라운 이야기였죠.
그렇게 <지킬앤하이드>로 뮤지컬에 데뷔했을 당시 스물네 살이었어요. 그때 별명이 ‘애기루시’였는데요. 세월이 흐른 만큼 ‘애기’ 대신 새로운 별명으로 불리고 싶진 않은가요?
<지킬앤하이드>의 데이빗 스완 연출님이 이번 <드라큘라>도 하고 계신데요. 지금도 저를 자꾸 ‘애기’라고 부르세요. “Where is 애기?”라고요. (웃음) 그래서 저는 이제 애기가 아니고 (이)예은이, (박)지연이보다 나이가 많다고 했더니, 그냥 애칭이라고 생각해 달래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좋은 마음으로 불러 주시는 거니까요. 그게 안 어울릴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별명으로 불릴 거라고 생각해요.
8년이 지난 지금, 예전에 비해 성장했음을 느끼나요?
그동안 일을 쉬면서 제 자신과 친해진 느낌이에요. 한국에선 사회적 기준이나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사는 게 힘들었어요. 몇 살 때는 이래야 하고 얼마나 이뤄놔야 하고, 이런 기준이 있잖아요. 캐나다에선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서 나라는 사람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어요. 나는 누구인가부터 시작해서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하나하나 알게 됐죠.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던가요? 선민 배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란.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처음 캐나다에 갔을 때, 빨리 한국에 들어오라는 엄마한테 “난 여기가 너무 자유로워”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한국에 있을 땐 뭐가 그렇게 안 자유로웠냐고 하셨어요. 맞는 얘기이긴 한데요. (웃음) 제가 삶에 제약이 생기는 걸 과도하게 불편해하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그럼 뮤지컬보다는 혼자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가 체질에 맞는 게 아닌가요?
그건 아니에요. 전 예전부터 제가 실연자(實演者)라고 생각했어요. 무언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제가 잘하는 걸 표현하고 싶어요. 창작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었어요.
작품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드라큘라>의 루시는 어떤 인물인가요?
루시는 호기심이 많고, 본능적이고 솔직한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처음 연습할 때는 루시의 발랄한 부분을 소화하는 게 어려웠어요. 평소 제 성격은 유쾌하기는 해도 그렇게 정신없이 ‘깨발랄’하진 않거든요.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어요.
그렇다면 반대로 즐거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과 협동 작업을 한 거요. 예전에 가수 생활 할 때보다 뮤지컬을 했을 때의 기억이 정말 좋았거든요. 그걸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게 좋았어요.
뮤지컬 작업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요?
인간적인 분위기요. 선배님들 개개인이 정말 인간적이셨어요. 그리고 이미 너무 잘하시는데도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거든요. 좋은 작품을 위해서 모두가 자기 몫을 해내고 더 잘하고 싶어 노력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그렇다면 이번 <드라큘라>의 동료 배우들은 어떤가요?
일단 같은 배역의 예은 씨가 도움을 정말 많이 줬어요. 예은 씨는 이전 시즌을 해서 다 알고 있는데 저는 모르니까 초반엔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예은 씨가 모르는 것도 잘 알려주고 챙겨줬어요. 예은 씨는 천사구나 싶었죠. (웃음) (조)정은 선배님에게도 큰 도움을 받았어요. 유일하게 전부터 알던 배우가 정은 선배님밖에 없었거든요. 개인적으로도 가까워서 의지가 많이 됐어요. <드라큘라> 첫 공연도 언니랑 같이 했어요. 끝나고 나서 언니가 우리 첫공 잘 했다, 오랜만에 작품 하는데 축하한다,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임)혜영 선배님은 가장 ‘깨발랄’한 미나예요. 미나와 루시가 만날 때 ‘찐친’ 같은 느낌이 들어요. 지연이는 웃겨요. (웃음) 무대에선 미나의 절제된 면을 보여주지만 실제 모습을 알고 연기하니까 재밌어요.
연습이나 공연 과정에서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가 있나요?
연습 중에 자가격리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오디컴퍼니에서 2주 동안 필요한 음식과 물품을 모든 배우들에게 배달해 주신 거예요. 그걸 받고 배우들의 분위기가 엄청 뜨거워진 적이 있어요. 힘들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더 뭉치는 계기가 됐죠. 얼마 전에는 코로나 때문에 회식을 못하니까 각자 집에서 먹으라고 좋은 고기를 나눠 주셨어요. 배우들끼리 인증샷을 올리면서 서로 기뻐하고 재밌어했죠.
허스키한 목소리가 루시의 넘버와 잘 어울린다는 반응이 많아요. 가장 좋아하는 넘버는 무엇인가요?
예전에는 ‘The Mist’였는데요. 처음에는 부담 없이 노래가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연습하고 무대에 서니까 마냥 즐기게 되진 않더라고요. ‘내가 이 노래를 제대로 소화하고 있나? 루시를 잘 표현하고 있나?’ 계속 생각해야 하니까요. 다른 배역 넘버 중엔 미나의 ‘If I Had Wings’가 좋아요.
극 중 드라큘라처럼 누군가 영원한 삶을 준다고 하면, 받을 건가요?
전 받을 것 같아요. 일단 귀한 거니까요.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고 난 후에는 후회할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불가능하고 희소한 일이기 때문에 끌릴 것 같아요. 그 시간을 잘 쓰진 못할 것 같지만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뮤지컬 활동은 좋은 작품이 있으면 계속 하고 싶어요. 가수 활동은 지금도 고민 중이에요. 요즘은 작곡 능력만 있다면 유튜브도 있고 얼마든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저는 그런 건 아니라서요. 회사랑 계약을 해야 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으니까요. 둘 다 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면 지금은 뮤지컬에 더 마음이 가요.
해보고 싶은 뮤지컬 작품은 무엇인가요? 한국에 돌아와서 인상 깊게 본 작품이 있다면요.
특별히 ‘이걸 하고 싶다’고 말하기에는 제가 아직 지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작품과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상 깊게 본 작품은 <포미니츠>예요. 김선영 선배님도 계시고 <지킬앤하이드>를 같이 했던 양준모 선배님이 예술감독으로 참여하신 작품이라 보게 됐는데요. 원작 영화도 좋아했는데 뮤지컬로도 잘 만들어졌더라고요. 저는 확실히 밝은 것보단 어두운 작품을 보면 이입이 잘 되는 것 같아요. 김환희 배우님으로 봤는데 너무 멋있었어요.
마지막으로 <드라큘라>를 보러 올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희 가족들이 <드라큘라>를 정말 재밌게 보고 가셨어요. 뮤지컬을 처음 보는 분들이 ‘뮤지컬’을 생각했을 때 떠올리는 모든 걸 보여주는 작품 같아요.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고 노래도 좋고요. ‘뮤지컬 뭐 보지?’ 고민될 때 이 작품을 보면 충족감을 느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뮤지컬 <드라큘라>
2021.5.20 ~ 2021.8.1
서울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공연 시간 165분
14세 이상 관람 가능김준수, 전동석, 신성록, 조정은, 임혜영, 박지연, 강태을, 손준호, 조성윤, 백형훈, 선민, 이예은 등 출연
올댓아트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사진|올댓아트 정다윤, 오디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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